톡톡-
소란과 흥분, 시끄러운 거리의 음악으로 정신이 약간 혼미해질 즈음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 시를 한 편 읽어도 될까요.”
하동 집회의 씨앗을 함께 심어준 농부님이 수줍게 말을 꺼냈다.
“그럼요!”
기다리던 손님을 만난 것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재생되고 있던 음악이 끝나자마자 마이크를 잡고 농부님을 소개했다. 목도리와 털모자로 무장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좌우로 흔들던 몸짓을 멈췄다.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농부님은 두툼한 점퍼 왼편에 끼고 있던 파일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광장에 핀 꽃
이 창일
광장에 어둠이 내리고
시민들 모여 들면
하나 둘 촛불이 번진다.
구호와 노래 틈에서
어느 청년이 들려준 시는
잠들었던 나의 상상력을 일깨운다.
누군가는 촛불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사회를 보고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누군가는 호박죽 만들어 오지만
우리에겐 지도부가 없다.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이 있을 뿐이다.
지난 동짓날 동지들 모여
탄핵을 자축하며 팥죽을 먹었다.
윤석열 파면까지 광장을 지키자고
토론하고 결정도 했다.
우리 모두는 동지다.
조금은 불편하고 낯설어도
모두가 참여하고
책임도 나누어 가지는
우리 모두는 지도부다.
우리 모두는 통치자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광장에서 싹트고 있다.
그 순간 오거리를 씽씽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은 완전히 물러났다. 짧게 깎은 회색빛 수염만큼이나 올곧은 그의 단어들. 농부님은 뽀얀 쌀밥을 짓듯이 시를 지어오셨다. 한 톨의 거짓됨 없이.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자 사람들은 태양빛에 목말랐던 해바라기들처럼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뒤쪽에 가려져 있던 한 분이 자신도 시를 읽겠다며 앞으로 나왔다. 색 바랜 시집을 꺼내더니 권정생의 <애국자가 없는 세상>을 또랑또랑하게 읽었다.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촛불이 불빛을 이어주듯, 시는 시로 이어졌다. 촛불이 거리를 밝혔다면, 시는 마음을 밝혀주었다. 단 두 편의 시는 늦겨울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연료가 되었다. 집회를 마무리할 즈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오늘 헤어지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어린이들이 행복한 세상, 함박웃음을 피우고 마음껏 뛰노는 세상, 어른들이 해야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건넨 마이크는 앞쪽 옆쪽 뒤쪽을 지나며 여러 세상들을 거쳤다. 그러다가 도착한 한 사람의 세상에서 또 한 편의 시를 만났다.
“저는 모든 사람이 시 하나는 외우고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저도 외우고 있는 시 하나가 있어요.” 사람들은 들뜬 박수를 치며, 그녀의 시가 흘러나오기를 마중 나갔다.
“쓸모없는 이야기, 진은영, 종이, 펜, 질문들, 쓸모,, 아 뭐였더라? 쓸모없는 거룩함, 아! 쓸모없는 부끄러움, 아,, 맞나? 아,, 그리고,,, ,,,, 푸른 앵두! 그래,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
그녀는 유일하게 외우고 있다던 시 한 편을 뭉근한 야채스프를 끓이듯 읊조렸다. 당근을 넣을까? 호박을 넣을까? 양파는 어떻게 썰까? 고민하듯이. 은근한 즐거움과 당당한 느긋함을 갖추고.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 아.. 아... 장미! 무슨 장미더라? 아...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아, 장미덩굴 가시들.”
광장의 사람들은 그녀의 시가 완성되기를 조마조마하며 지켜봤다. 침묵 속에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히 태어나는 것을 기다렸고,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로 그녀는 결국 시를 완성시켰다. 새 생명의 탄생에 박수를!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멕시코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문장이 생각나게 하는 밤이었다. ‘많은 세계가 있을 수 있는 세계이고, 하나이면서도 다양할 수 있는 세계’라는 그의 말처럼 지금 한국에서 겪는 분열은 세계 곳곳에서도 오래간 앓아온 것이자 멕시코도 마찬가지이다.
멕시코 치아파스의 원주민 공동체는 경제 세계화가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심한 끝에 강력히 저항했고, 그 이유로 끔찍한 학살과 감시를 지금까지 겪고 있다. 그 때, 처음 세계화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을 시작하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말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그러했다. 정부는 허위 정보와 부인으로 진실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마르코스는 마야족 신화, 우화, 존 버거, 보르헤스, 돈키호테의 말로 여유 있게 대응한다. 그 속에는 멕시코 치아파스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다른 공동체가 있고,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시민이 있고, 민주주의, 정의, 자유,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인간이 있고, 자기 자신이 있고,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더 큰 빛으로 악을 봉인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 요즘, 우리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말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나는 더듬거리며 거리에서 시 한 편을 외우고 싶어졌다. 우리의 시는 우리의 무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