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최은영 첫 산문집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276쪽
작년 늦여름, 최은영 작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읽고 또 읽어 닳아버린 책을 들고 가 조심스럽게 사인을 받았다. 작가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말재주가 없다.”며 대신 자신의 글을 직접 읽어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했고, 우리 앞에서 금세 흩어졌다. 그녀의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면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날 그녀가 읽어준 글은 다음 해 봄 출간될 첫 에세이의 일부였다. 그리고 올봄, 마침내 『백지 앞에서』가 출간되었다. 2013년 『쇼코의 미소』로 등단한 이후 장편과 단편소설로만 독자들을 만나온 최은영 작가의 첫 에세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일기장에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어려웠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작가가 세상에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또다시 버려질까 두려워 견뎌야 했던 착취적인 관계, 갑상선암 투병 이후 비로소 늦춰진 삶의 속도,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외모 강박과 혼자 사는 삶의 존엄에 대한 고민까지.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 세월호 참사, 동물권 같은 사회적 문제를 향한 시선 역시 담겨 있다. 인간 최은영, 그리고 작가 최은영을 이루는 거의 모든 시간이 이 책 안에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어떤 이야기들은 결국 꺼내놓아야만 했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신과 세계를 인간으로서, 또 작가로서 치열하게 고민해온 시간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사적인 고백은 때로 다른 누군가를 살아가게 만든다. 『백지 앞에서』는 조용하지만 깊게 마음에 스며드는 책이다. 최은영의 소설을 사랑해온 독자라면, 그녀가 어떤 삶을 지나며 그런 이야기들을 써낼 수 있었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질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한 대답으로 읽힌다.
[악양면 ‘이런책방’ 화요지기 양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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