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死票)를 양산하는 이상한 선거제도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오명 속에 대통령 선거가 초박빙의 승부로 끝났다. 윤석열 48.56% : 이재명47.83%, 단 0.73%(24만 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다. 그러나 24만 표 차이로 이겼든, 1표 차이로 이겼든 모든 권력을 승자가 독식한다. 패자를 뽑은 국민들의 표는 사표(死票)가 된다. 실제 이번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정의당) 등을 찍은 국민의 표까지 따지면 총투표자의 51.44%인 1,766만 표가 사표가 되었다.
사표(死票, dead vote)는 ‘선거결과 낙선된 후보자에게 던져진 표’(출처 : 두산백과)를 말한다. “민주적 선거 제도는 다양한 주권자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보면 많은 국민의 표를 사표로 만드는 현행 선거제도는 비(非)민주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다득표를 한 1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소선거구제·다수대표제’(이하 소선거구제) 방식은 현재 대통령·국회의원·지자체장 선거에서 시행되고 있다.
소선거구제 방식의 선거결과를 보면 이 제도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지난 17~21대 총선 결과를 보면 평균 50%에 가까운 사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또한 다르지 않다. 지자체장 선거의 경우 소선거구제를 채용한 결과 진정한 민의와 거리가 먼 선거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하동의 경우 지난 6, 7대 지방선거에서 48~75%에 이르는 사표가 발생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윤상기 후보(무소속)가 8,079표(득표율 24.73%)로 당선됨으로써 75.27%가, 2018년에는 윤상기 후보(자유한국당)가 16,776표(득표율 51.89%)로 당선됨으로써 48.11%가 사표가 됐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다수대표제’는 민의를 제대로 반영 못 해
사표를 조장하고 양산하는 소선거구제는 다양하고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째, 심각한 민의의 왜곡이 나타난다.
민주당은 49.9%의 득표로 국회의석수의 60%를 차지함으로써 득표수보다 30석이나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정의당은 9.67%를 득표하고도 의석수의 2% 밖에 차지하지 못해 23석의 손해를 보았다. 국민의당 또한 득표율에 비하면 17석이나 의석수가 적다. 거대 양당이 이득을 보고 소수 정당이 손해를 보는 ‘과잉대표·과소대표 현상’ 이 나타난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지역구에서의 패배로 미래통합당조차 투표율에 비해 22석이나 적은 의석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민의를 왜곡하고 소수 정당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제도를 통해 거대 양당의 기득권은 더욱 공고화되고, 유권자의 선택과 괴리된 정치지형이 만들어진다.
둘째,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 네거티브(Negative) 선거전략이 판을 친다. 상대를 비난하며 ‘상대방은 최악(最惡)이고 나는 차악(次惡)’이라는 프레임으로 당선을 노린다. 내가 찍는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면 내 표가 사표가 된다는 절박함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거대 양당의 유력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당연히 민생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개발과 정책 대결은 사라진다.
셋째, 지역주의 또한 심화된다. 승자독식의 소선구제에서는 정책개발에 힘쓰는 것보다 상대 후보를 흠집내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선거 전략을 통해 부동층을 흡수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의 지지율이 높은 지역에선 공천만 받아도 당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내 경선에서조차 네거티브 전략이 기승을 부린다. 하동에서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내의 과열경쟁과 돈 봉투 사건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당공천 없이 8명의 후보가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낯부끄러운 일까지 벌어졌다.
넷째, 당선자의 대표성과 비례성이 사라진다. 2014년 하동군수로 당선된 윤상기 후보의 경우 25%에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로 승리했는데, 투표율까지 감안하면 불과 20% 안팎의 지지율로 지자체장의 막강한 권한을 독점했다. 갈등과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 중·대선거구제로 다당제를 실현해야
해결책은 없는 걸까?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는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다. 비례대표제의 강화, 결선투표제의 도입, 중·대선거구제의 실시가 그것이다.
비례대표제(총선, 지선)는 각 정당의 정책을 보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면 정당 내부에서 결정한 차례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이다.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결정되므로 정당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게 되고 정책 선거가 펼쳐진다. 사표가 사라지고 국민의 다양한 선택에 따라 다당제가 실현된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정치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결선투표제(대선, 총선)는 소선거구제에서 당선자의 득표율이 50%에 미치지 못할 경우 결선투표를 진행하는 제도이다. 결선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소수 정당과의 연대나 정책수용이 불가피하므로 다양한 국민의 가치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결선투표를 거치면 선거구민에 대한 대표성이 높아져 권력의 정당성이 강화된다. 이미 전세계 88개 국가가 이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지선)는 소선거구제와 달리 선거구당 3인 이상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제도이다. 각 정당이 선거구당 1인의 후보자만 추천할 수 있도록 제도화(복수추천 금지)한 상태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면 소수 정당의 후보자가 함께 당선될 수밖에 없으므로 정치적 다양성이 실현된다. 현행 거대 양당체제의 많은 해악이 사라지게 된다.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권은 정치개혁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지난 2월 27일 민주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대선승패와 상관없이 정치제도 개혁을 하겠다’며 <국민통합 정치개혁안>을 만장일치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날의 발표에는 대통령 4년 중임제·결선투표제 개헌, 국무총리 국회추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중·대선거구제, 위성정당 방지 등을 언급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선을 앞두고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는 비판이 나왔던 이유이다.
민주당 의석이 172석에 이르고 정의당 등의 소수 정당과 연대하면 거대 양당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국민의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제도 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 대선에서는 패배했으나 여전히 입법부(국회)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국민의힘의 반대를 이겨내고 “절박한 정치개혁 과제를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반드시 실천할 것을 국민 앞에서 엄숙하게 결의하고 약속 드린다”는 공약을 제대로 실천하는지 모든 국민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민주적이고 공정한 선거제도 없이는 민주주의의 발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