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 금남면 주민)
혈관이 막혀 신체에 피가 잘 돌지 않을 때 이를 ‘동맥경화’라 한다. 동맥경화에 걸리면 생명이 위험하다.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경제도 마찬가지다. 온 사회 전체에 돈이 돌고 돌아야 하는데 잘 돌지 못하면 이게 ‘돈맥경화’다. 동맥경화가 한 개인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듯, 돈맥경화는 한 사회의 현재는 물론 미래를 위험하게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한 사회에 돈이 결코 없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돈은 넘치고 넘칠 지경인데 돈맥경화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 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돈벌이 경제는 크게 세 측면에서 돈맥경화를 초래한다.
첫째, 구조적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한다.
쉽게 말해 돈 있는 이는 더 많은 돈을 벌고, 돈 없는 이는 갈수록 돈벌이가 힘들어진다. 그러니 나라 전체적으로 돈이 제대로 흐르지 못한다. 그러면 돈 있는 이가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버는 통로는 무엇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이다. 얼마 전 LH사태나 최근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태에서도 잘 드러나듯, 고급 개발 정보를 가진 자가 땅을 많이 사뒀다가 각종 ‘개발 호재’에 힘입어 엄청난 시세차익을 거둬 벼락부자가 된다. 이러니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돈 없는 이들(심하게는 빚 갚기도 버거운 이들)에겐 돈이 귀하고도 귀하다. 거의 말라죽을 지경이다. 게다가 땅값이나 집값이 그런 식으로 오르면 월세나 전세살이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더 살기 힘들어진다.
둘째, 실물경제와 금융경제가 구조적으로 분리된 탓도 있다.
1971년에 미국 닉슨 대통령은 2차 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기본 방침이었던 ‘금태환제’ 포기를 선언했다. 금태환제란 미국 달러를 가져 오면 그 가치에 해당하는 금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1년 이후로는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말로, 미국은 금(실물가치)이 없어도 돈을 마구 찍어내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것이 실물경제와 금융경제가 구조적으로 분리된 배경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경제, 즉 수출과 수입 등 실제 무역에서 쓰이는 돈은 전체 돈의 5%밖에 되지 않고 95%는 외환투기, 주식투기, 선물거래, 파생상품 거래, 가상화폐, 검은돈 거래 등이다. 한 사회나 세계 전체를 유기체로 본다면 이 유기체를 살리는 혈관 역할을 하는 돈은 5%밖에 되지 않고 95%의 대다수 허구적인 돈은 거품 덩어리만 요란하게 만들어내고 있으니, 실제로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회경제는 돈맥경화에 걸릴 수밖에 없다.
셋째, 원리상으로 오늘날 경제는 인간적 필요 충족이 아니라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돌아간다.
원래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세상을 잘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한다는 말에서 왔다. 한마디로, 사람이 먹고사는 살림살이 과정이 곧 경제다. 그러나 우리가 공식적으로 경험하는 경제는 살림살이가 아닌, 돈벌이가 핵심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집이나 옆집이나 그 대다수가 눈만 뜨면 ‘어떻게 돈을 벌까?’라는 생각만 한다. ‘어떻게 행복할까?’란 생각은 거의 하지 않거나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족 중에도 월급을 받는 직장인은 경제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아무 월급도 없는 주부는 하루 종일 일(가사노동, 육아노동, 돌봄노동 등)을 해도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그러면 돈벌이 경제는 어떻게 돈맥경화에 걸리는가? 돈벌이 경제가 돈과 상품을 매개로 제아무리 화려하고 ‘있어’ 보일지라도 그 역시 생로병사하는 유기체처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돈벌이 경제도 대체로 처음엔 잘 나간다. 산업화 초기엔 물건을 만드는 족족 다 잘 팔린다. 사람들이 돈 버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상품이, 물건이 차고도 넘친다. 마치 설탕물을 탈 때 어느 정도 설탕이 충분하면 더 이상 잘 녹지 않는 원리와 같다. 마침내 시장이 거의 ‘포화’ 상태로 달려간다.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은 대략 다 샀고, 모자라는 물품은 별로 없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상품이 더 빨리 더 많이 나온다. 갈수록 격차가 벌어진다. 그래서 기업들은 광고나 유행을 통해 자꾸만 신상품을 더 많이 팔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여전히 역부족이다. 한켠에 상품이 돌지 못하고 쌓이는 정도로, 다른 편에서는 돈이 돌지 않고 오갈 데를 잃는다. 처음엔 돈벌이 경제가 인간적 필요 충족에 도움 되는 한에서 상품과 화폐가 동전의 양면처럼 박자를 맞추었는데, 갈수록 돈벌이 경제가 포화상태를 넘어 내리막길로 달리면서 돈맥경화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돈맥경화’를 해결할 묘약이 있을까? 결코 쉬운 길은 없다. 그러나 그 기본 아이디어는 우리 신체에 동맥경화의 위험 신호가 왔을 때 음식, 운동, 관계를 통해 건강을 되찾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첫째, 건강한 신체를 위해 건강한 음식이 필요하듯, 건강한 경제를 위해선 건강한 에너지, 건강한 물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써야 한다. 지금처럼 무조건 돈벌이를 위해 해로운 에너지(온실가스나 방사능 유발)와 해로운 상품(무기는 물론, 환경호르몬과 미세플라스틱, 암유발 물질,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쓰레기 방출 등)을 생산, 소비해선 안 된다. 사람에게도 좋고 자연에 해를 입히지 않는 방식의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건강한 신체를 위해 적절한 운동이 필요하듯, 건강한 경제를 위해선 사람들이 자신의 재주, 재미, 의미를 살리는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온 사회에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무조건 돈벌이가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와 더불어 사회 기여를 동시에 해내는 그런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나야 좋다.
셋째, 건강한 신체를 위해 좋은 인간관계가 필요하듯, 건강한 경제를 위해선 공동체적 관계망을 착실히 구축해야 한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닥치고 돈벌이’가 아니라 ‘행복한 살림살이’를 위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인간적 필요를 위해선 지구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탐욕(무한 이윤)을 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또, 피터 모린의, “모두 가난해지려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요, 아무도 부자가 되지 않으려 하면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도 매우 시사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잘 모른 채 무조건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며 살 뿐이다. 약간의 물질적 성취를 이루게 되면 그런 착각이 더 굳어진다. 그러나 갈수록 이 사회는 본의 아니게 ‘돈맥경화’로 치닫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전혀 모르고 그저 돈벌이에 빠져 살다가는 자칫 인생 헛살기 쉽다.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제대로 공부해야 진정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금남면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