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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느린 삶] 슬기로운 퇴비간 생활

조선원

-악양면 주민
봄비는 퍼붓고 똥이 마려울 때 잠시 수세식 변기의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산 들고 퇴비간에 앉아 엉덩이로 튀는 빗방울을 감내하면 뿌듯하다. 나의 퇴비간 생활은 2010년 귀농하며 시작됐다. 농사의 근본은 퇴비의 자급이라 생각했던 귀농학교 시절의 다짐도 있었지만,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의 두엄간이 시초다.
아버지의 두엄간은 가을에 시작된다. 낙엽들과 외양간, 돼지우리, 닭장에서 나온 짐승들의 배설물이 주요 재료다. 가을걷이에서 나온 콩대, 고구마 줄기, 볏짚은 소의 여물에 쓰인다. 겨우내 짐승들의 공간에서 나온 똥오줌은 눈과 찬바람 속에서도 따스한 날이면 숙성되느라 김이 나곤 했다. 아지랑이 피는 봄이 오면 두엄간에서도 아지랑이가 올라온다. 숙성되면서 나는 시큼쿵큼한 냄새와 함께. 아버지와 머슴 아재의 큰일이 봄날 두엄을 뒤섞는 일이다. 호구라는 농기구를 사용해 두엄을 섞을 때면, 쌀쌀한 3월인데도 두 분이 땀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맡았던 그 오묘한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선명한데 말로 하기는 어렵다. 서너 번의 뒤집기를 거친 두엄은 드디어 들로 나간다. 두엄은 논의 흐드러진 자운영 꽃에 부어져 써레질할 때까지 한 달 여의 2차 숙성기를 갖는다.
나는 어린 마음에 자운영꽂에 부어지던 두엄이 싫었다. 발목까지 물이 찬 자운영꽃이 핀 논에서 오후 햇살을 등에 지고 노는 즐거움을 더는 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의 두엄간이 가을에 시작해 봄에 흙으로 가는 짧은 순환이 가능했던 건 마른 낙엽과 짐승들 똥오줌과 바닥에 깔아줬던 볏짚이 잘 버무려져 두엄간에 갔고, 사람 똥도 그 때는 순수물질이었기에 짧은 숙성이 가능했던 것 같다. 또 하나 음식물 찌꺼기는 돼지나 닭의 먹이여서 두엄간의 재료들이 단순했었다.
퇴비간: 3년을 발효하면 커피가루 같은 흙이 만들어 진다. 제대로 발효되면 향기도 난다.
나의 퇴비간으로 오자. 나의 퇴비간 주기는 3년. 똥, 생풀, 음식물 쓰레기가 커피 찌꺼기처럼 고와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3년. 1년에 한 무더기를 쌓고 다음 해 옆에 또 한 무더기를 쌓으면 된다. 그렇게 세 무더기를 돌아가며 퇴비를 만든다. 처음엔 나무판으로 공간 구분을 했지만 금방 썩어버렸다. 이런저런 공간 나눔의 시도를 하다 요즘엔 적당하게 세 개의 퇴비더미를 나란히 쓴다. 퇴비간을 본 이웃들의 반응은 크기가 작다는 것.
두 식구라 들어가는 양도 적지만 퇴비간에 들어가는 조건도 까다롭다. 가능한 한 빨리 분해되게 똥도 납작하게 눌러 넣고 수박 껍질 등 분해가 오래 걸리는 것들은 아주 잘게 썰어 넣는다. 바나나, 오렌지 등은 바짝 말려 쓰레기 봉지로. 3년 후 나오는 양은 페인트통 크기로 5~6통. 양이 부족하지만 재와 오줌이 열일하니 족하다.
예전엔 집마다 퇴비간이 당연했는데 요즘엔 거의 없다. 귀농해서 동네를 둘러볼 때 한집도 퇴비간이 없어 놀랐다. “비료가 만사형통인데 뭔 퇴비간이냐!”고 나무라던 할배의 표정이라니... 지구살이의 두려움이 점점 커지는 요즘, 똥이 밥이 되는 자연스런 순환이 이웃들 집집에서 살아나길 간절히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