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다큐 영화로 유명한 구자환 감독이 있다. 그 4부작은 <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레드툼: 빨갱이 무덤>, <해원>, <태안> 등이다. 그와 함께 지난 6월, 하동과 인근의 가슴 아픈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기행(다크투어)을 했다. 크게 다섯 곳을 갔다. 하동읍 국민보도연맹본부 건물, 부춘리 인근 섬진강 뚝방, 하동지역 민간인 학살 현장1(화개면), 화개전투 학도병 추모공원, 하동지역 민간인 학살 현장2(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산116-23번지, 매티재) 등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동, ‘별천지’ 하동이지만, 전국 곳곳이 그러하듯 고통과 트라우마를 간직한 곳이 꽤 있다. 편견 없이 정직하게 대면해야 할 우리 역사다.
가장 먼저 하동군 국민보도연맹 본부가 있던 건물(하동읍 청년회관길 13)을 탐방했다. 현재는 2001년 이후 ‘하동지역자활센터’가 있다. 원래 역사적으로는 항일독립 정신의 구심이다.(예, 하동장터 3.18만세운동, 정규영 선생은 1919년 ‘파리장서’ 서명, 아들 정재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 3.18운동 직후인 1920년 하동읍에 세운 하동청년회관이 그 원조다. 이 건물은 1927년 신간회(1월)나 근우회(5월)의 하동지부 사무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후 1949년 6월, 이승만 친일·반공·독재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에게 전향 기회를 준다.”는 구실로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면서 하동군 본부로 쓰였다. 당국은 한국전쟁(6·25) 7개월 전인 1949년 11월에 “좌익”(민주·진보) 세력에 대해 ‘자수 기간’을 주었는데, 전향자 수가 전국적으로 약 4만이었다. 경남의 자수자는 5,548명이었는데, 합천 1,305명, 산청 1,224명, 하동 134명 등이라 한다.(이하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하동군 지역의 맹원 수는 약 3,000명, 11개 면 각기 평균 300명 정도였다. 국민보도연맹 하동군지부 간사장은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전영우이며, 진교면 이상백, 적량면 박지화, 양보면 정치용, 횡천면 송재웅, 금남면 전복인 등이 각 면 지회장이었다.
하동군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1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학살로 목숨 잃은 사람은 국민보도연맹 간부들로, 일반 맹원은 화를 면했다 한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일반 맹원들을 보호한 이(예, 당시 하동경찰서장)에게 훈장이라도 줘야 한다. 학살 당시 하동경찰서 순경으로 사찰계 내근직을 맡았던 조 씨의 증언으로, 국민보도연맹 조직 당시 각 지서 직원들을 경찰서로 불러들여 국민보도연맹 가입과 명부를 직접 작성케 했는데 대략 3,000명 정도라 했다. 책자 형태의 명부에는 이름과 주소, 과거 활동 경력 등이 기록됐다.
한국전쟁 발발 보름만인 7월 10일쯤 맹원들 소집 지시가 경남도 경찰국에서 하달됐다. 그에 따라 하동군 간부를 비롯, 11개 면 간부급 맹원들이 하동경찰서에 집결됐다. 진주에서 온 특무대원들이 GMC 트럭 2대에 싣고(대당 약 40명) 진주형무소로 데려갔다. 그러나 이들은 산청 인근의 육십령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보도연맹 간사장 전영우는 미리 도피,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하동의 진짜 좌익들은 보도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사태의 위험을 미리 감지, 지리산으로 피했다. 목숨을 잃은 맹원들은 엄밀히 말하면 좌익이 아닌 이들이 대다수였다.
첫 학살(7.10) 이후 보름 뒤인 (인민군이 하동에 진주하기 바로 전날) 7월 24일에 두 번째 학살이 있었다. 진주형무소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다가 이후 검속된 맹원들이 하동경찰서 유치장에 40~50명 정도가 수감돼 있었다. 하동경찰서 경찰관들은 이들을 밤에 트럭에 실어 섬진강 건너 전남 광양시 진상면 백운산 끝자락인 매티재로 데려가 학살했다. 매티재 현장은 지반이 암석이라 매장이 어려워 시신들이 처참하게 방치됐는데, 차후에 유족에 의해 대부분 수습됐다 한다.
2024년 윤석열의 12.3 내란이 성공했다면 75년 만에 또 다른 학살이 터질 뻔했다! 한강 작가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 내란을 막는 데 기여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