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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동을 떠나온 이유

배혜원

영화감독
나는 2022년까지 하동에 적을 두고 살았지만 이제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여전히 하동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외에도 누릴 것이 많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면을 빌어 내가 떠나온 이유를 구구절절 적어보고자 한다.
내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겪은 사례들이 하동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동료들에게, 혹은 하동이 조금 더 행복한 곳이 되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첫 번째는 청(소)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슨 막연한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말 그대로 ‘젊은이들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동에서는 2~30대 ‘젊은이’들은 소수이다. 하동군 장학재단에서 10대 청소년들이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도록 독려하고 지역을 떠나서 살도록 열심히 지원해준 결과, 대부분이 떠나고 하동에 남은 이들이 하동에서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제한되어있다. 1.취업, 2.창업, 3.가업을 물려받는 일이다. 뒤집어 말하면 하동에서 대학 입시, 취업 등 시험 준비를 하거나 스스로의 앞날을 구상하며 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 마땅히 누려야 할 스스로의 권리(예를 들어 산악열차 반대) 같은 것을 주장하면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라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경제적인 능력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경우에 그들을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고 살피기보다는 ‘대학 가면’ 혹은 ‘취직하면’ 심지어 ‘결혼하면’ 사회 참여나 욕구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식의 고정관념에 부딪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각자의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하동을 상상해본다.
두 번째는 문화 인프라 부족이다. 문화 인프라는 단순히 영화관, 커뮤니티 공간 등 물리적 토대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가지 고민과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함께 할 수 있는 취미활동과 콘텐츠 등도 인프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동 지역의 이야깃거리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부동산을 개발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산악열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같은 이야기의 중심에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할 것인가’ 하는 과거의 성장모델이 있다. 저성장과 기후위기 시대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더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탈성장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시대에 고소득 고소비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저소득, 저소비가 오히려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적게 소비하고 재미있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그렇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냐’라는 어긋난 반문에 가로막힌다. 꼭 돈을 많이 벌고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친구가 될 수 있어 고맙다’ 혹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겁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게 되기를 바란다
세 번째는 청년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동에서는 2020년부터 청년기본조례를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지만, 지원대상이 되는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창업 지원이나 농업인 지원 등에서도 상충하는 조건들이 있다. 나의 경우 청년 창업농에 지원했지만 사업자등록증이 있다는 이유로 반려된 적이 있다. 이처럼 약간의 지원사업이라도 받아보려고 하면 그 조건에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지원사업의 자격요건에 나를 맞추다 보면 ‘내가 살고 싶은 방향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운 마음도 든다. 하동군에서 적극 지원하는 농업, 관광업의 종사자가 아니면 혜택을 받기 어려운 점, 저렴한 농가주택은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점(그리고 하동의 땅값은 나 같은 저소득 프리랜서가 감당하기에 쉽지 않다) 등.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고는 하동에서 원하는 삶을 살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주거비가 저렴하면서 문화적 인프라에 접근성이 좋은 인근의 소도시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
최근 지방소멸의 문제를 청년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청년을 유입하려 노력하고, 청년 기본 소득과 같은 아무리 좋은 지원 정책을 시행하더라도, 청년 세대를 단지 ‘인구를 늘리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할 때, 이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청년뿐 아니라 장애인, 노인, 여성 등 각자가 하동에서 어떤 삶을 살아오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섬세한 조사·연구가 선행되고 그에 맞는 인식의 전환과 지원 정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추세로 봐서 하동의 인구 소멸 경향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인구의 수만 가지고 지방소멸을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과 지방소멸 위기의식에 과도하게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성호, “지방소멸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2019)
막연한 개발에 대한 환상보다 현재 남아있는 하동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는 게 어떨까. 나도 그런 하동에서 살고 싶다.

2023년 6월 /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