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금남면 주민
45년만의 ‘비상계엄’에 사람들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화들짝 놀랐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경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다행히 이는 12월 4일 새벽 1시경 국회에서 “해제결의”됐다(헌법 77조 5항). 마침내 12월 14일 오후 5시경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을 위한 국회의 ‘탄핵 소추’가 가결돼(재적 300명 중 찬성 204표) 종결됐다. 가결 소식에 나 역시 하동 촛불광장에서 목이 쉬도록 ‘윤석열 탄핵’을 함께 외치던 이웃들과 “민주주의여, 만세!!!”를 삼창했다. 모두들 기쁨의 눈물과 웃음을 함께 나눴다.
이 글에선 꼬박 12일에 걸친 이번 과정에서 도드라진, ‘산 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노벨상 수상작가 한강은 이십대 청춘 이후 (광주학살을 기억하며) 두 질문을 늘 가슴에 품었다 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였다. 아마 초등 시절에 직접 본 1980년 광주학살의 충격과 공포가 작가에게 남긴 흔적일 터! 내가 이번 과정에서 본, ‘산 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까닭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으며,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
첫째, 12월 3일 밤 ‘비상계엄’ 발표 직후부터 사람들은 국회로 몰려갔다. 예전 같으면 모두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사람들은 1979년 10월과 12월, 그리고 1980년 5월의 ‘계엄 트라우마’를 넘어 국회로 내달렸다. 헌법 77조 5항에 따라 국회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계엄 해제가 가능함이 SNS를 타고 전국에 퍼진 것! 일부는 정문으로, 대부분은 담벼락을 넘었다. 45년 전에 죽은 자들이 오늘의 산 자들을 살리는 순간이었다.
둘째, 윤석열과 김용현, 여인형 등 계엄 핵심의 의도와 달리 중간 전달 벨트나 현장 계엄군들은 다행스럽게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내 기억에 꽂혔다. 1 국회 침탈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본관 유리창을 천천히 ‘질서 있게’ 깨고 넘어 들어간 뒤, 난초 화분을 조심스레 옆으로 옮겨놓았던 장면, 2 계엄군의 총을 붙들고 “(이런 무력 침탈이) 부끄럽지도 않아?”라며 항의하는 여성에게 해당 군인이 아무 말도 못한 채 방아쇠로부터 손가락을 떼며 뒤로 물러서던 장면, 3 국회 안으로 들어온 군인들에 맞서던 50대 여성 보좌관들이 군인의 뺨을 때리며 “우리 아들도 군대 갔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라며 꾸짖던 장면, 4 국회 안으로 진입하려던 군인들을 일반 시민들이 못 들어가게 옷과 몸을 끌어당기던 장면, 5 일부 고위 군인들이 국회에서 (부하들에게) “무능한 지휘자 만나 (치욕을 겪게 해), 미안하다.”며 울먹이던 장면이나 “처음부터 불법성을 느끼고 명령을 거부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속마음을 토로하던 장면들이 바로 그것! 초중고 시절, 우리 모두는 경쟁이란 폭력을 견디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우리는 ‘폭력의 희생자가 가해자로 둔갑’하지 않고 인간성을 지켰다. 우애와 연대로 인간성을 보존했다. 바로 그 인간성의 조각들이 생사를 건 순간에도 아름다운 장면을 구현했다.
셋째, 그러나 특히 12월 7일과 12월 14일, 축구장 400개 정도 크기의 서울 여의도로 몰려든 전국 각지의 백만 내지 이백만 명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길고 짧은 연설과 구호, 박수와 함성, 노래와 율동 등으로 하나의 멋진 축제를 펼쳤다. 민주주의 수호의 축제에 20-30대 청춘도 많았다. 물론, 여전히 윤석열과 주변인들, 국힘당이나 태극기부대 등은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한다. 그러나 역사는 민주주의의 편이다. 마치 김수영 시인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던 풀처럼, 민초들은 패배하고 쓰러지고 실망해도 또 일어난다. 그렇게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 결국 민주주의는 비틀거리면서도 한걸음씩 전진, 또 전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