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금남면 주민
이제 ‘기후위기’라는 말조차 한가하게 느껴진다. 2023년만 해도, 산불, 냉해, 폭염, 가뭄, 긴 장마, 홍수, 태풍, 가을장마 등으로, 농민들 한숨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이제 기후참사, 기후재앙의 시간이다. 그레타 툰베리가 2018년부터 5년 이상 던지는, “우리가 함께 사는 지구 집에 불이 났는데, 왜 모두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죠?”라는 질문이 절박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하동참여자치연대 주관 아래 9월부터 10월까지 6회에 걸친 ‘기후위기 특강’이 있었다. 기후위기의 현실과 심각성, 기후위기의 원인,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방식, 자본주의적 대안(그린 뉴딜), 탈자본의 대안1(구조적 차원), 탈자본의 대안2(행위적 차원)가 바로 그 내용들이다.
그런데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첫째, 가장 심각한 것은 ‘음모론’(현실 부정)이다. 기후위기라는 건 애당초 없는데, 괜히 그것으로 이득을 보려는 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태도! 그러나 주변 농민들 얘기만 들어봐도 음모론은 사실무근이다.
둘째, 기후위기, 겁낼 것 없다는 입장이다. ‘기술 혁신’으로 대처 가능하다는 태도! 일례로, 탄소흡수 기술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줄이거나 기존의 탄소 배출을 현저히 줄이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기존 경제 패턴을 고수하려 한다.
셋째, 기후위기를 인지하되, 한국의 경우 기존의 온대 기후가 ‘아열대 기후’로 변했으니 이 기후 변화에 걸맞은 농산물을 재배하면 수입이 짭짤하다는 태도! 이미 애플망고, 레드향, 백향과, 패션프루트 등 아열대작물이 우리 땅에서도 재배된다. 얼핏, 참신한 대안처럼 보이나, 이는 기후위기에 정면 대처하는 게 아닌, ‘발 빠른’ 적응에 불과하다.
넷째, 각종 국제회의에서 나온, ESG(환경, 사회, 협치). RE100(재생에너지 100%), SDGs(지속가능발전 목표들), ‘그린뉴딜’ 등으로 상징되는 전략적 개념들도 있다. 이런 입장은, 녹색경영 전략 도입으로 기후위기 극복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라는 자본의 시스템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
나는 이 모든 걸 무책임한 ‘가짜 해결책’이라 본다. 그러면 ‘진짜 해결책’은? 그것은 지구나 자연을 단지 돈벌이의 대상으로 여겨 ‘끝까지’ 파괴하는 자본, 나아가 사람을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오로지 노동력으로 보고 ‘끝까지’ 착취하는 자본, 이 자본관계를 ‘당장 그만’ 두는 것! 영화 <설국열차>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맨 앞의 기관차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함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자본(관계)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이고 어떻게 하면 소박하게 살더라도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을지 토론해 나가야 한다. 물론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지금 이대로’ 가면 파국과 공멸이 더 빨리 오게 되어 있다는 것! 솔직히, 인류는 파국을 ‘예방’하긴 글렀다. 온갖 국제보고서(예, IPCC보고서)나 책들이 말하듯,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파국을 지연시키는 노력을 하되, 막상 파국 상황에서 (생존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토론, 성찰, 상상해야 할지 모른다. 여기에 힌트를 주는 2023년 영화가 있다. ‘재난 공동체’에 관한 얘기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엄태화 감독)가 그것이다. 고강도의 지진과 붕괴 참사에서 우연히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아파트 103동의 거주자들(소유주들)이 ‘자경단’까지 만들어 다른 외부인들을 철저히 봉쇄한 채 자기들만의 유토피아(차가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결사 노력하는 것은 ‘결코 해답이 아니다.’
영화의 끝에 나오듯, 이미 부서진 아파트 잔해 속에서나마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작지만 따뜻한 공동체’를 이루는 장면처럼, 우리는 아예 다가올 재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건전한’ 재난 공동체를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할지 모른다. 아마 이 건전한 재난 공동체는 파괴나 착취, 억압과 차별이 없는, 그리하여,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평등한 자유인들의 연대체가 될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강조하듯, “중요한 것은 재난이 아니라 재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의 방향을 바꿀 기회를 잡으려는 투쟁”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