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욱
시인, 악양면
집 앞 도랑물을 들여다본다. 성제봉 윗자리에서 맑게 번져 나와 이렇게 아랫돌 비치도록 깨끗하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으스대며 흐르고 있다. 왠지 찜찜하다. 저 물이 아래로 내려오다 그 사이사이 더러운 훼방꾼이 없었기로, 아무런 애쓰지 않고 여기까지 맑을 수 있겠다. 아랫물이 윗물의 투명을 내려받기만 해도 무난한 시절이면 좋으련만, 어쩌다 지난밤 까칠한 소낙비라도 쏟아지면 어쩌려나. 설령 윗물이 흐리더라도, 돌을 헤치고 흙을 뚫고 흐르면서 물 아닌 것들을 가려 떨구고, 마침내 물이 물로만 맑게 남아 이어져야 할 텐데. 물은 원래 위/아래를 나란히 맞추는 걸, 어느 날 닿은 땅이 그저 높고 낮을 뿐이니 ‘윗물이 더러워도 아랫물은 맑다.’가 더 적극적인 말이다.
어제 일을 생각한다. 물가에 갔는데 누군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왼손으로 벼리[紀] 끝을 잡고, 왼 어깨에 벼릿줄[綱]를 걸치고, 오른손으로 그물을 쫘으악 펼치며 강물을 휘우듬하게 덮었다. 그가 가진 손보다 더 많이 한꺼번에 쉽게 얼른 물고기를 잡으려는 꼼수를 보며, ‘그물이 삼천 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라는 속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물에서 벼리를 더 쳐줘야 그게 곧 ‘기강(紀綱)이 선다’라는 건데, 이것도 찜찜했다. 조직(組織)이면 으레 위에서 아래의 목줄을 쥐고 있는 판이려니 그저 ‘알아서 하십쇼!’ 하며 스스로 낮아지는 처세일 수 있지만, 대체 그물코들은 왜 자기 자리를 우기지 못할까? 어쨌든 물고기는 그들의 단단하고 촘촘한 코에 달려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위계의 편의에 붙은 근성이야말로 개 못 주는 오랜 버릇이다.
다시, 얼마 전 방문했던 관청을 생각한다. 마을의 숙원 사업 문제로 민원을 접수하러 갔는데, 담당자와 이러쿵저러쿵 말 방아만 찧다 일이 수월치 않게 되었을 즈음, 그리 경력이 많아 보이지 않던 담당자 왈, ‘이런 일은 군수님을 직접 찾아가는 게 훨 빠른 길’이라고 대놓고 귀띔했다. 저승사자도 술 먹이면 삼십갑자가 삼천갑자로 바뀐다는 이런 구닥다리 편법이 어째서 오늘 이 담당자의 입에서 여전히 살아남았을까. 그것도 주위 동료들의 귀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저 없이.
그렇다, 행정은 늘 여전히 그랬던 거다. ‘사람의 조직을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표어도, 막다른 골목에 몰린 어느 혁명가의 악에 받친 변명처럼 슬프지만, 조직의 조직원들이 모두 스스로 꼽사리로 자처한다면 실낱같은 시스템조차 영원히 무용하리라.
“우리는 물이 아니라 땅바닥이라서 늘 윗물을 내려받을 뿐, 윗물이 버젓한데 아랫물이 왜 오탁을 염려하겠습니까요. 우리 코는 그저 벼리에 달라붙어 강물을 휘이익 스쳐갈 뿐, 물고기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요. 괜히 흙탕물 거르다 내 몸 더럽히고, 괜히 물고기 지느러미 붙잡으려다 힘줄 끊어집니다요.
삼 년이면 서당의 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럼 내가 개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나는 내가 먼저 방울을 달고 싶지 않은 길든 고양이입니다요. 우리 집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걸 이해하십니까. 힘들게 된장 근근이 담고 있는데 괜히 와서 구더기 같은 소리 마시고, 귀에 거는 귀고리를 코에라도 걸어 줄 테니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이게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닙니까요. 알 만한 양반이 그것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