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주
요가 안내자, 적량면
결국 지고 말았다. 올 여름 밤에는 에어컨을 틀어버렸다. 자취를 시작하고 10년 동안 에어컨이 없는 채로 살았다. 하동에 와서도 선풍기로 그럭저럭 여름을 보내려 했지만, 집에서 공부방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집으로 들이게 됐다. 그마저도 아이들이 오기 1시간 전부터 수업 마칠 때까지만 반짝 틀곤 했었는데. 올 여름은 그것을 두고 밥상 위에 매달아놓은 굴비마냥 입맛만 쩍쩍 다시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령처럼 떠돌던 기후위기가 실재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숨이 턱턱, 정신이 헤롱헤롱. 정말 더위에 죽을수도 있겠구나…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 곳에 살고 있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나는 리모콘으로 on을 눌렀다.
‘여기까지 와서….’ 무력감이 들었다. ‘여기까지’라는 말 안에는 시골이면 좀 더 수월하게 에너지를 덜 들이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그런데 웬걸, 서울에서 하동으로 온 첫해에 그것은 도시인의 또 다른 로망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오자마자 중고차를 구입해서 타기 시작했다. 일을 하려면 이동을 해야 했는데 버스 배차 시간을 보고는 바로 포기했다. 필요한 교재가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대형서점에 직접 가서 사던 때와는 달리 인터넷 배송을 시켰다. 차마 버리지 못한 뽁뽁이들은 창고에 쌓여만 간다. 가공식품은 여전히 포기하지 못해서 우후죽순 비집고 들어오는 편의점은 마치 내가 끌어당긴 것만 같다.
쓰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핑계임이 분명해져서 이제 민망함까지 더해져 버렸다. 바람 쐬자며 자동차 타고 나가는 일을 줄이려 노력하고, 필요한 책은 동네 책방을 통해 배송을 한 번으로 줄인다든가 도서관에 희망 도서로 신청해도 되지 않았을까? 마트보다 장터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장바구니 이용을 널리널리 알릴 수도 있었을텐데… 물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일이 개인의 죄책감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아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만회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몇 년 전 친구들과 했던 ‘좋은 삶 실험일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그때 나는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 타기를 실험했고, 한 친구는 사 먹지 않고 해 먹기, 또 다른 친구는 채식 위주로 식사하기를 실험했다. 그때는 기후위기가 아니라 개인의 좋은 삶에 초점을 두고 시작했지만, 실험 내용은 ‘1.5도 라이프스타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좋은 삶은 결국 모두의 좋은 삶으로 연결된다.
다시 실험을 시작해야겠다. 이번에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조금 더 가까이 두고 큰 그림을 그려 본다.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도 있지만, 여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에 너른 바탕이 되어준다. 포장재 없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 마을마다 있는 자원순환공간, 한가한 공공시설의 올바른 공적 활용… 마을 곳곳을 들여다보니 이런 그림은 여기저기 거칠게나마 그려져 있었다. 재미있겠는데? 그러면 이제 여기서 재미나게 뛰어놀 친구들이 필요하다. 좋은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우린 무얼 할 수 있을까? 같이 실험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1.5도 라이프스타일은 일상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국가 계획 기준에 맞춰 줄여가는 라이프스타일 실험이다.
해외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시민적 차원에서 시행해오고 있으며, 올해 녹색전환연구소에서 기획한 실험에 23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소비, 주거, 여가, 교통 등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가늠해보고 탄소 중립 계획을 다시 세워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