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명예교수, 금남면 주민
<오하동> 신문 7월호, “농가 숨통 틔워주는 외국인 노동자”란 기사가 눈길을 끈다. 나 역시 약 20년 전, 한국노동연구원(KLI)에서 이 주제를 연구한 바 있다. 당시 산업연수생 제도는 “현대판 노예제도”이기에 서둘러 독일식 고용허가제 내지 노동허가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뒤 현실은 개선되기도, 개악되기도 했다. 산업연수생제가 공식 철폐된 것은 개선이지만, 고용허가제가 도입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이 제한되거나 기존 사업주 동의 없이는 이동이 힘들게 된 점 등은 개악이다. 앞의 기사는 하동군에 공식상 거주하는 1천여 “외국인 노동자”들의 정확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면서 이들을 단순한 “인력”이 아닌 삶의 “동반자” 내지 “이웃”으로 보자고 제언한다. 지극히 옳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날로 늘어나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을 보탠다.
첫째, 통상적으로 우리는 (“이주 노동자”보다)“외국인 노동자”란 말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해외여행 때 입출국 수속을 할 때마다 종종 느끼듯 “내국인”과 “외국인”을 나누는 개념은 이미 민족국가 단위로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실이 반드시 옳다거나 미래지향적인 건 아니다. 평소엔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별 문제가 없다가도 약간의 이해관계가 틀어지거나 분쟁이 발생하면 자세한 사정은 따지지 않고 단지 ‘국적’에 따라 금세 생사를 가르거나 적대관계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어느 나라가 우리 편인지에 관심을 갖지, 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하는지, 궁극적으로 공생하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이런 문제엔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단순히 국적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풀뿌리 민초의 관점이 아닌, 국적을 매개로 통제하거나 돈벌이 하려는 자들의 관점일 뿐이다. 풀뿌리 민초의 관점은 국적이나 인종, 소속과 무관하게 우애와 환대, 소통과 협력, 연대와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외국인 노동자 대신 ‘이주 노동자’로 불러 보자.
둘째, 흔히 사람들은 “불법 체류자” 내지 “불법노동자”란 말을 쓴다. 물론 합법과 불법은 다르다. 그러나 해외에서 국경을 넘어 이주노동자가 되거나 국제결혼을 한 경우처럼,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누구도 “불법 인간”이 아니다. 굳이 불러야 한다면 “미등록 노동자” 내지 “미등록 이주민”이 있을 뿐! 그것도, 다양한 사정에 의해서 공식 등록을 못했을 뿐, 관청에 신고, 등록하면 된다.
하동에도 이주노동자 센터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