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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 키우며 농사 짓듯 책도 짓는다 - 상추쌈 출판사 전광진(49) 씨

Q. 이런 질문은 수십 번 들으셨겠지만 왜 시골에 오셨어요?
하동 오기 전에 어린이 그림책, 세밀화 도감 같은 것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했어요. 그 출판사가 생태나 교육에 관련된 출판사라서 시골로 취재 다니는 일이 많았어요. 시골에 사는 분들과 책을 많이 냈기 때문에 시골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서 아내도 저도 아이는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키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옮겼죠.
악양면 부계마을에 위치한 상추쌈 출판사. 보리출판사 출신 서혜영·전광진 부부가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Q. 한강 작가의 노벨상 열풍이 출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책은 몇 권이나 내셨나요?
저희는 환경과 생태 쪽으로 내고 있고요. 알라딘에서 보면 환경/생태분야 출판사 상위에 올라 있어요. 저희는 도시에 있는 출판사가 하기 어려운 것을 기획하지요. <생강밭에서 놀다가 해가 진다>, <어제를 향해 걷다>, <야마오 산세이 시선집>,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 <나무에게 배운다>, <쇠나우 마을 발전소>, <조약돌 할아버지>, <안녕, 모두의 바다>, <골목길 붕어빵>,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그리고 작년에 제가 쓴 책 <농사 연장> 등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두 권씩, 총 스무 권 정도는 냈네요.
Q. 농사일과 겸업하시는 거죠?
겸업이긴하지만 밭 3마지기하고 논 3마지기뿐인 걸요. 우리 먹고 남는 건 꾸러미로 예닐곱 집 정도 보내는데요. 쌀, 밀가루, 마늘, 양파 이 정도고요. 이전엔 푸성귀도 보냈는데 최근 한 이태 정도는 보내지 못했어요. 애들 일도 바빴고, 사실 농사지어서 꾸러미로 보낸다는 건 또 다른 일이잖아요.
전광진 씨가 밀 탈곡을 하고 있다.
Q. 밀농사는 어떤가요?
악양 부계마을에 밀 방앗간이 있었어요. 거기서 빻는 게 제일 좋았는데 길을 확장하면서 헐렸어요. 조금씩 내는 밀방아가 옛날에는 동네마다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몇 군데 안 남았죠. 밀 방앗간이 그 동네 있느냐 없느냐가 밀농사를 지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고 같은 거예요.
Q. 쌀농사는 잘 되나요?
쌀농사는 작년에 다 멸구가 왔잖아요. 기후문제에요. 저희는 밀농사를 짓기 때문에 모내기가 늦어요. 다른 사람들 모내기할 때는 저희는 아직 벼가 파랗고 어려요. 멸구는 익은 벼를 좋아하거든요. 저희는 그것 때문에 운 좋게 멸구를 피한 거고 이상 기후로 더운 날이 계속되니까 얘들이 알을 한 번 더 낳은 거예요. 벼멸구가 농업 재해로 처음으로 지정됐어요. 올해도 이렇게 더운 날씨가 이어지면 틀림없이 이런 일이 벌어지겠죠. 일본에는 작년에 쌀 수매가가 70% 오른 지역도 있어요. 기후위기는 농업으로 제일 먼저 올 수밖에 없고요.
Q. 이제 농사짓는 데는 도사가 되셨겠어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농사는 어려서 배우지 못하면 익힐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농사는 한 해에 한 번 짓잖아요. 농사 기술을 익히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나이 들어 농사 짓는 사람에게는 좀 한계가 있죠. 어렸을 때부터 농사지으신 분은 흙의 상태나 물을 보면 딱 아시거든요.근데 저는 그게 안 되는 거죠.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요.
작은 농사와 시골 살림에 쓰이는 연장 이야기. 전광진 씨가 작년에 직접 쓰고 출판한 책이다.
Q. 농사와 출판사 겸업인데 두 가지 하시니까 경제적 여유는 있나요?
거의 불가능해요. 아이가 셋이예요. 초등학교 하나,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 시골에 살아 도시보단 생활하는데 돈이 많이 필요하진 않아요. 다만 아이들 교육비가 갑자기 많이 들어가는 시기가 있잖아요.요즘이 그래요. 그래서 작년부터 아내가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또 시골에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들여야 하는 시간이 많아요. 아이들이 타고 다니는 교통편이 제일 힘듭니다. 일하다가도 아이들에게 차 시간 맞춰야 하니까요. 그리고 동네에 애들이 없고, 어른들이 애들 키워 본 지가 오래돼서 애들 키우는 걸 다 잊으셨어요. 그런 게 제일 어려워요.
그동안 하늘 한번 쳐다보고 허리 한번 두들기다 밭을 포기한 나는 전광진 씨가 쓴 책 <농사연장>을 읽으며 올해는 <농사연장>에 소개된 초소형 경운기를 장만해 야심차게 밭을 갈아 채소 농사를 제대로 지어 보아야지 마음먹는다.
귀촌 10년 차지만 농사에 있어서는 선무당과 다름없는 나 같은 사람도 <농사연장>에 나와 있는 연장의 이름쯤은 다 알 것 같으니, 굳이 그 쓰임새를 익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이런 건방진 편견은 소리 없이 쪼그라든다. 나무 한 토막도 주인에 따라 쓰임새와 운명이 달라지듯 전광진 씨 집에 있는 연장과 우리 집 연장은 팔자가 아주 다른 것 같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정성을 들인 마음으로 농사지었을 그 쌀과 밀이 먹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