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도입될 AI 디지털교과서로 교육계뿐 아니라 사회가 어수선하다. AI 디지털교과서는 ‘학생 개인의 능력과 수준에 맞는 학습 기회를 지원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을 포함한 지능정보기술을 활용하여 다양한 학습자료 및 학습지원기능 등을 탑재한 교과서’라고 한다.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속도로 수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교사를 딜레마에, 학생은 무기력에 빠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과연 AI 디지털교과서는 교실의 이런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구세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내심 기대되면서도 각종 언론에 비치는 문제점들을 보고 있자니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AI 디지털교과서의 도입, 충분한 논의와 준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돼
무선 인프라 보급과 속도 확보, 디바이스 지급등 물리적 준비와 교과서 활용 주체인 교사 연수의 부족, 수조 원으로 예상되는 소요 예산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부담함으로써 발생되는 고교무상교육 같은 기존 교육 정책의 위축과 지방 교육 자율성의 침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로 지칭되는 아이들의 문해력 저하나 스마트기기 중독 가속, 코로나 사태 속 스마트 기기 활용 수업의 일상화로 앞서 경험한 또다른 교육 격차의 발생 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우려와 논쟁들은 나라마다 디지털 교육 정책 방향이 제각각인 걸 보면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곤 해도 AI 디지털교과서의 도입이 충분한 논의와 준비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된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 정책이 세워지고 급하게 추진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길지 않은 교육 경력에 비해 해외 여러 교육 현장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북유럽 교육 선진국으로 불리는 핀란드, 스웨덴과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 동북아시아 교육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싱가포르, 일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국가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매번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성스레 글씨를 쓰고 소리내어 책을 읽는, 기본을 중시하는 교육 풍토가 중요해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일본이었는데, 우리 교육 현장과 제일 비슷한 만큼 작은 차이도 크게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교장실의 모퉁이가 터진 낡은 소파나 교실의 오래된 책걸상은 검소함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국민성이라 치더라도 교사용 노트북 한 대와 빔프로젝터가 유일한 ICT 기기로서, 교과서를 단순히 디지털 형식으로 옮겨놓은 PDF 파일을 활용한 수업이 선진화 수업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수많은 디지털 교육 기기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대한민국 교육 현장과 대비되면서 우리 교육의 역동성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성스레 글씨를 쓰고 소리내어 책을 읽는등 기본을 중시하는 교육 풍토와 3학년 남짓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청소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쓰인 걸레를 각자 들고 교실 바닥을 닦거나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화장실 곳곳을 직접 청소하는 장면을 본 후로는 자부심은 온데간데없고 마음한편에 고민만 한가득 안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것에 대한 고찰없이 엉뚱한 처방만 내리고 있진 않은지
교육은 원래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언젠가부터 사회 변화에 민감하고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 변화가 빨라졌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류에 휩쓸려 본질을 놓치거나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교육은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기제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고 달려오진 않았는지, 작지만 지켜나갈 것들에 대한 고민엔 소홀하지 않았는지 반문하고 싶다. 또한 학생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고 엎드려 자는 것이 일상화된 교실, 자살이 여전히 10대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등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것에 대한 고찰없이 말단적이고 지엽적인 데 몰두하여 엉뚱한 처방만 내리고 있진 않은지 되묻고 싶다. 우리 사회가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으로 시작된 이번 논란을, 정작 지켜나가야 하고 우선 고민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이미 교실 현장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간 무수한 정책들의 선례를 돌아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