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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 혹은 민주주의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가슴 아픈 사연들로 몇 번이나 책장을 덮었지만 그중에서도 학살의 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어린 동생을 살리기 위해 엄마가 자신의 손을 깨물어 피를 내어 자식에게 먹이는 장면에서는, 최근 내 손녀가 자신의 빠진 윗니를 보여 주던 사랑스러운 모습이 겹치면서 더더욱 엄마의 그 마음이 내게 전달되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 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을지? 3만 명 이상의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중에는 1500명으로 추산되는 어린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씨를 말리는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왜 이들은 이러한 끔찍한 짓을 저질러야만 했을까? 저항할 수 없는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죽일 수 있는 그 잔인함은 어떤 마음에서 나왔을까? 누군가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자식이며 형제자매로서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함을 보여준 이들 중에서도 ‘서북단’으로 불리는 북한출신 기독교신자들이 가장 선봉에서 학살을 자행했다고 전해진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과학자이자 경제학자인막스 베버는 근대화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와 합리화(rationalization)의 과정’이라 한다. 주술과 이념 혹은 그릇된 믿음이 결합되면 인간은 양심이 작동되지 않는 로봇으로 변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함이 정당화되며 양심을 무력화시킨다. 기독교의 주술적 성격과 이념으로 무장된 서북 청년단의 반인륜적인 학살 행위! 수백만 명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이승만의 생명경시. 중세 마녀사냥, 십자군전쟁,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육 역시 주술의 힘이 양심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최근 이태원 사태나 채수근 상병의 죽음을 대하는 윤석열과 김건희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나 계엄 포고령에 나타났듯이 자신의 반대세력을 ‘처단’하라는 비상식인 행동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천공, 건진법사, 전광훈, 명태균, 노상원 등이 있었고, 이러한 주술사들이 대통령 부부를 영적으로 지배했다고 보면 그들의 행동을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치대를 나와 치과병원을 운영하던 한 여인이 주술적 성격이 강한 스승이라 칭하는 자를 만나 몸과 마음을 뺏겨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광경을 보았다. 정신적으로 자기 정체성이 미처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윤석열 부부로선 그들 주변의 주술사들의 말이 구원처럼 들렸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크리슈나무르티란 인도의 세계적 영성가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순간 자유는 없어지고 노예상태에 놓여진다.”는 말과 함께 그가 속한 단체를 해체하고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자격으로 전 세계에 강연을 다녔다. 우리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주술이나 점, 사이비종교, 물질만능주의 등에 정신적으로 의존하며 자유를 잃은 전근대적 왕조시대의 백성 혹은 북한 주민들과 비슷한 노예상태에 빠져 자신이 주인인 민주주의의 뿌리내림을 막고 있다. 우리 시대의 주술에는 빨갱이로 상징되는 이념, 이단적인 기독교, 타락한 불교 등의 종교, 돈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배금사상, 사치품이 명품으로 둔갑된 명품 중독, 아파트 투기와 같은 불로소득 등이 있으며 이러한 주술이 삶의 기준이 되어 자신은 물론 우리 이웃들을 노예상태로 만들고 급기야는 윤석열 같은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우리 미래를 근대화된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 널리 만연된 이러한 모든 주술적이고 맹목적 인 믿음, 유혹을 얼마나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