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다큐 영화의 구자환 감독과 함께 다음으로 간 곳은 화개면 부춘리 인근 섬진강 뚝방과 하동지역 민간인 학살 현장이다. 이 학살현장 위쪽에는 1950년 6.25 한국전쟁 직후의 화개전투에서 희생된 학도병을 기리는 추모공원도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동, ‘별천지’ 하동이지만, 전국 곳곳이 그러하듯 고통과 트라우마를 간직한 곳이 바로 우리 곁에도 있다. 불편하고 두려워 회피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 정직하게 대면할 우리 역사다.
하동 읍내 국민보도연맹 본부가 있던 건물을 본 뒤 우리는 섬진강변을 따라 화개 쪽으로 올라갔다. 구 감독은 화개면 부춘리 인근 섬진강 뚝방에서도 제법 많은 양민 학살이 있었던 걸로 들었다 한다. 구 감독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2006년 경 진실화해위 조사 때 부춘리 인근 마을에서 그 이야기를 해준 노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녹취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 이후에 다시 마을을 찾아갔는데, 예전 그 노인을 아무도 모른다했다 한다. 구 감독의 느낌으로, 처음 마을에 구감독 등이 찾아간 것부터가 그 분에게는 ‘비밀이 들킨 기분’처럼 보였다 한다. “그걸 어떻게 알고 여기 왔소?” 아마도 이런 정서였을 터.
널리 알려진 바, 학살의 피해자나 목격자들은 학살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자칫 (누군가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제2, 제3의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움에 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 한동안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풀어 놓긴 하는데, 그러다가도 별안간 ‘잘못하면 또 당한다.’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말을 자제하거나 완곡어법으로 표현하기 일쑤다. 여하간 팩트는, 전쟁 직후에 화개면 부춘리 섬진강변 뚝방에 경찰들이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살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 아쉽게도 우리는 2025년 현재 그 어떤 증언자도 만날 수 없어 부춘리 뚝방 인근은 더 자세히 답사할 수 없었다.
그 다음은 화개장 인근인데, 그 옛날 담배창고가 있던 곳(지금은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상업공간으로 사용됨)이다. 그곳에 양민들을 임시로 모아 놓았다가 학살터로 데리고 갔다는 것. 지금은 감쪽같이 변했지만, 1950년 당시엔 땀과 눈물, 아우성과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것이다.
그 담배창고가 있던 지점에서 악양 쪽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면 ‘OOOO모텔’이 나온다. 그 왼편으로 오솔길이 있는데, 계단을 따라 오르니 ‘하동지역 민간인 학살 현장’이란 입간판이 하나 나온다. 한국전 전후 하동지역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가 비영리법인 명의로 세운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이 집단 학살된 장소이므로 학살피해자들의 유골이 집단으로 묻혀 있습니다. 유해 발굴 시까지 훼손하지 말 것을 당부드립니다. 부득이 훼손하게 될 경우 미리 아래 연락처로 연락 바랍니다.” 그 아래엔 “유해 위치: 화개면 탑리 산86번지(안내판 정면 20미터)”가 있었다. 그리고 연락처로 전화를 하니 여성 노인이 받는데, 연로하셔서 소통 자체가 힘들었다.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에 보면 하동지역 양민학살은 주로 광양 매티재 고개에서 이뤄진 것으로 나오는데, 화개면 탑리에서 이뤄진 건에 대해서는 공식 기록이 현재로선 없다. 유족회나 하동군 관계자를 면담해야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 학살 현장 위로 한참 계단을 오르면 ‘화개전투 학도병 추모공원’이 나온다. ‘양민 학살 현장’에 비해서 공원화 사업이 잘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안내판과 설명도 비교적 자세히 되어 있다. 모텔 옆으로 오르는 길도 있지만 화개광장 옆으로 오르는 길도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산책로를 오르면 기억의 광장, 추모 전망대, 참호마당, 충혼탑, 학도병 전적비 등이 나온다. 입간판에는 “화개전투 학도병 추모공원은 6.25 전쟁 당시 전남 동부권 17개 학교에서 (혈서를 쓰고) 지원한 183명의 학도병(국군 보병 5사단 15연대)이 북한군 6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숭고한 희생정신(약 70명 희생)을 기리고, 안보의식의 고취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