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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와 선돌

평사리 최참판댁 주차장 입구에 꽤 높은 바위가 세워져 있다. 정면에 ‘박경리土地文學碑’가위에서 아래로 음각되어 있고, 뒤에는 2001.11 평사리를 다녀와서 박경리’라는 글과 함께 그 아래 ‘박경리 연보’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측면에 이 비를 세운 내력을 새겼는데 ‘2008.10 하동군민의 뜻을 모아 악양면민이 세우다. 악양면토지문학비 건립추진위원회’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신 그해 몇 달 뒤 바로 이 비를 세운 셈이다. 참으로 발 빠른 추모정신이 가상하지만, 비 앞에 서면 고개를 웬만큼 젖히지 않고서는 다 볼 수도 없는 엄청난 돌덩어리. 과연 이런 거석이 선생의 행적과 소설 『토지』를 올바르게 기린다고 볼 수 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내가 듣기로, 2004년 이곳 평사리에 건립한 문학관을 두고도 박경리 선생은 오히려 자기 때문에 지리산 자락이 손상되었다고 미안해하셨다고 했다. 또, 이 문학비가 건립되었을 때도 선생의 유족이나 지인들은 선생의 품성을 헤아려 문학비 건립을 꺼려했다고도 들었다.
소설 『토지』가 1969년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 26년 만에 탈고하였고, 약 20권 분량으로 원고지 매수가 3만 장이 넘으며, 등장인물도 넉넉히 600명을 웃도는 그야말로 엄청난 작품이라서, 박경리 선생보다 소설 『토지』의 웅대함을 더욱 기리어 이 비(碑)를 세운 것이라 변명하더라도, 왠지 책 내용에 대한 이해보다는 단순히 방대한 분량만 본뜬 구조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소설 『토지』에는 그 어떤 인물도 이 문학비처럼 주변 사람들에 비해 우뚝하고 웅장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흔히 주인공이라 일컫는 서희도 당시 시대를 대표할 그 어떤 위상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자신의 욕망과 복수를 위한 집념의 길을 찾아가는 지독한 한 사람일 뿐이다. 소설 속의 그 많은 다른 등장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 평등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하소설로 알고 있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등과는 달리 소설 『토지』는 한두 사람의 중심적인 등장인물을 위주로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 특징이 오히려 위대한 소설로 인정되는데, 이런 거석으로 그 가치를 존중함이 당연하다고 다시 우긴다면, 지금의 이 선돌을 차라리 옆으로 널찍하게 눕혀 놓은 것이 더 어울리는 기념비(?)가 아닐까, 나는 감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널찍한 반석이라면 그 위에, 지나가던 누구나 걸터앉아 가던 길 한숨 돌리기도 하고, 길게 드러누워 잠들기 전에 『토지』한페이지를 편히 읽기도 하고, 오늘처럼 가을바람 서늘한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 모여 앉아 그저 세상 돌아가는 소문에 떠들고 웃기도 하는, 그렇게 우리 곁의 평범한 세월을 무릎 아래에서 단단히 받쳐주는 든든한 바위였으면 좋겠다고, 공연히 안타까운 마음을 내어 본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 1993년판 『토지』 서문에 적은 선생의 말처럼, 옆으로 나란하게 누운 기념비 주변에 온갖 ‘풀잎’이 나풀거리고, 서글서글한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가 우짖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