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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할아버지 지진 드세요

참을성 없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어른에게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아홉 살 꼬마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이 널뛰기 비슷합니다. 아이들이 우유병을 감싸 안고 있는 아기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맑고 투명해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런 날에는 꼬마들이 좀 까불어도 허허 웃으면서 넘깁니다. 널을 굴러 높이 오른 내가, 눈 아래 있는 상대를 향한 너그러움이라 할까요.
모처럼 시험을 쳤습니다.
[문제] 저녁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할아버지를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답] 할아버지, 지진 드세요.
진지와 지진의 뜻을 파악해야 할 고난도 문항입니다. 아이들에게 ‘진지’라는 용어는 ‘지진’만큼이나 난해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채점하다 보니 아이 편을 들고 싶습니다. 그건 그래, 조상님은 지진을 드실 수 있을 만큼 대단하셔. 하지만 그 속 깊은 오답 위에 사선을 긋습니다. 야박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문제] 저녁에 아버지 친구분들이 오신다고 합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답] 땅콩 사러 가기
아이 눈높이에서 보면 납득이 갑니다. 손님이 오셨고 냉장고에 병맥주가 줄을 맞춰 서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필요한 것은 뭡니까? 안주, 땅콩 아니겠습니까? 아이가 손님맞이를 위해 땅콩 사러 가는 일은 아주 적절한 봉사활동입니다. 나는 땅콩이라는 답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시험지에 아홉 살 인생의 세상물정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어떤 때 아이들은 고집 센 아기 염소 같습니다. 역시 시험 치는 날입니다. 하지만 아홉 살 인생에게 시험이란, 공부 안 하고 빨리 답 써넣고 운동장에 나가기 위한 시간일 뿐입니다. 몇몇 녀석들은 ‘대충 답을 적어내고 얼른 운동장에 나가 놀아야지!’ 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나는 파란 하늘 녹색 들판에 나가고 싶은 아기 염소들한테 호소합니다. 제발 우유 한 잔 마시는 시간만큼이라도 참고 시험 좀 제대로 봐 달라고. 하지만 몇몇 시험지는 벌써 뒷면으로 넘어갑니다. 아이 한 명이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무뚝뚝이가 뭐예요?”
“뭐? 무뚝뚝이?...몇 번 문제인데? 아...무뚝뚝하다...그건 말이다, 남에게 친절하지 않고 귀찮게 생각하고 대하고......”
약 십초 후 다른 아이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무뚝뚝하다’가 뭐예요?”
“아까 설명했는데...애들아 잠깐 모두 잘 들어라. ‘무뚝뚝하다’란..”
‘에휴 힘들어’하고 자리에 앉는 순간 또 한 녀석이 손을 듭니다.
“선생님 ‘무뚝뚝하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으이그...‘무뚝뚝하다’는 말은...어쩌고 저쩌고”
“야! 이놈들아 도대체 선생님이 녹음기냐 뭐냐. 엉!!!!”
나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울그락 불그락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아무리 인상을 쓰고 호통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꼬마들은 눈만 깜빡거립니다. 일 분도 안 지나서 ‘무뚝뚝이’가 뭐냐고 또 묻습니다.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됩니다. ‘뭐 그딴 일로 그렇게 흥분하시나’하는 아이들 표정을 보면 나는 또 널뛰기를 하는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널을 힘차게 구르고 폴짝 뛰어오른 아이가, 제 풀에 화가 나서 방방 뛰는 어른한테 혀를 쏙 내미는 것 같지 않나요?
최형식
섬진강이 흐르는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교사가 되어 하동과 다른 도시를 오락가락 하다가, 지금은 하동에 정착하여 노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022년 3월 /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