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량면 구재봉 자연휴양림 인근에 들어선 ‘국가무형문화재 낙죽장 공방’: 철근콘크리트 슬라브구조물 2동으로, 공방·수장고·사무실·전시실·회의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
하동군은 국비와 군비 15억 5000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국가무형문화재 낙죽장 공방’을 지난해 11월 완공했다. 적량면 서리 구재봉 자연휴양림 인근에 들어선 공방은 연건평 464.9m2의 철근콘크리트 슬라브구조물 2동으로, 공방·수장고·사무실·전시실·회의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
김기찬 낙죽장(68)
이 공방의 주인장 김기찬 낙죽장은 개장식과 더불어 “기찬 삼씨전”(글씨, 솜씨, 맘씨)이라는 주제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이날, 그는 그동안 틈틈이 써온 시를 모아, 시집 <화두라는 감옥에서 나를 꺼
내다> 와 <반야배에 돛을 올리고>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가졌다.
낙죽(烙竹)이란 인두로 대나무 겉면을 지져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과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며 이와 같은 기법으로 만든 대나무 공예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낙죽에 쓰이는 도구는 인두와 화로이며 알맞은 열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인두는 두 개를 준비하여 화로에 꽂아 두고 번갈아 사용한다. 낙죽은 우리만의 독특한 전통공예의 하나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아 전승되고 있다.
소년기는 송광사 금죽헌에서 29년
화재로 눈에 보이는 것 모두 잃고
청년기는 새로이 시작한 보성의 계심헌
열심히 살아온 13년, 집이 좁아졌네
낙죽이 국가무형 유산으로 지정된 지
62년 만에 하동 삼화실에
열매가 맺어졌네
(시집 <화두라는 감옥에서 나를 꺼내다> 중 ‘환골탈태’에서 발췌)
낙죽에 쓰이는 도구: 인두와 화로
낙죽장 김기찬(68)의 예술 생애는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새로 공방을 마련한 하동시절이 그의 인생 마지막 주옥같은 커튼콜이 될 것이다. “이제 나이도 있고 5년에서 10년 보고 있
습니다”라고 그는 말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집념은 “무한대 허공의 무늬를 담”는 예술혼이 춤추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하루에 5시간 자고 밤12시까지 작업한다는 그가 보여주는 건강관리 비법인 ‘손가락 집고 팔굽혀펴기’를 거뜬히 해내는 걸 보면 정신뿐 아니라 몸도 아직 청춘인 듯 보인다.
아들아! 작품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 없는 습작의 과정을
두루 거치는 과정에서 안목이 높아지며
비로소 네가 원하는 모양이 나오는 것이다.
기술의 단계를 넘어야 예술이 되고
예술의 단계가 극에 이르러
도의 단계로 넘어간다.
기술의 단계는 헤일 수 없을 만큼
많은 반복을 통해 달인이 되는 것이고
예술의 단계는 스스로와 만인이
정묘하다고 탄복할 만큼의 경지이고
도의 경지는 욕심이 없어 자유자재하며
한 생각에 작품이 완성되는 경지이다.
이때에 이르면 몸은 하루 스무 시간 일하고
네 시간만 자도 피곤하지 않아
자나 깨나 감사한 마음만 있고
기적이 내 안에서 이뤄진 것이다.
(시집 <반야배에 돛을 올리고> 중 ‘아들에게 쓰는 편지’
에서 발췌)
송광사 금죽헌에서 29년 동안 만들었던 작품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오직 하나 남은 당시 서울, 국가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전시 중이던 ‘낙죽 반야심경’ 필통
송광사 금죽헌에서 29년 동안 만들었던 작품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오직 하나 당시 서울, 국가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전시 중이던 ‘낙죽 반야심경필통’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겐 과거에 대한 미련은 없고 앞으로 펼쳐질 하동에서의 미래가 희망차 보인다. 언젠가 훌륭한 전시관을 건립하여 그곳에 평생 만들고 수집한 낙화와 낙죽을 전시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하동군에서 이 공방을 마련해 주어 이제는 열심히 작품에 전념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인재 육성과 후학을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전수장학생 2명(18-30세)의 자리가 남아있다고 한다. 하동에서 낙죽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몰려와 그의 뒤를 이을 ‘낙죽장’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기대를 펼친다.
하동군 적량면에 있는 국내 최초 융ᆞ복합 자연주의 예술전문 교육기관인 ‘한국조형예술원 실용전문학교’, ‘삼화에코하우스’, ‘구재봉자연휴양림’과 더불어 낙죽장 공방 유치가 적량면을 문화 마을로 이끄는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