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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과 행복의 조건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금남면 주민
다윈의 <종의 기원>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연상시키는 <행복의 기원>이란 책이 있다. 저자 서은국 교수는, 행복(쾌락)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결국, 음식과 섹스가 행복의 핵심이라니, 참, 명쾌하다!
2014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그간 인류의 화두인 ‘행복’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통념을 하나씩 검토하고 비판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널리 수용된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생각도 틀렸다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개나 공작과 다르지 않은 동물이다. 따라서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의 수단일 뿐!
이 관점에 따르면 화가 피카소는 다른 동물처럼 생명체의 목적인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마음의 정신적 산물이나 생각들은 결국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내 눈에 이런 주장은 매우 ‘용감’하다! 왜냐하면, 대체로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적 관계에 따라 행복도가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우애로운지가 행복의 핵심이라 보는데, 이 책은 그런 시각을 오류라 한다. 즉, 행복은 객관적 삶의 조건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고 보며(“행복은 새우깡”,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라 한다!) 또,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하는 건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이라 본다.
물론, 행복감은 주관적 감정이기에 객관적 조건과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에게 객관적 조건(생활에 필요한 물적 토대, 건강과 여유, 공동체, 생태계)은 주관적 행복을 위해서라도 거의 필수로 충족돼야 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의 개인차는 이 물적 조건의 차이와 더불어 주관적 가치관의 차이도 반영한다고 본다.
일례로,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조차 이웃사촌의 관계 내지 마을공동체가 활기차다면 얼마든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살아 있는 공동체라야 부의 성장 역시 건강한 과정을 밟을 것이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은 ‘성장 중독증’에 깊이 빠져 친밀한 인간관계와 공동체,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사실, 위 책은 이런 조건들 안에서의 개인적 행복 지침서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 책이 지나치게 생물학적이면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이면서도 사회적 존재이고,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 존재다. 여기서 나는 불행감이 엄습함을 느낀다. 왜 그런가?
첫째,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한 체험의 한 사례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행복의 본질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을 은폐한다. 일례로, 대통령이 나라를 말아먹고 판검사가 사법 시스템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등 온 세상이 ‘병든 사회’가 되고 있는데, 그런 것엔 눈 감은 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과 섹스를 나누며’ 행복하다는건 자기기만 아닌가?
둘째, 지금 자본주의는 갈수록 그 이윤의 원천이 축소, 고갈되는 상황이라 새로운 이윤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노동 착취 외에 아직 남은 자연생태계를 더 파괴한다. 이 맥락에서 행복의 조건들(심신 건강과 여유, 친밀한 인간관계, 정겨운 공동체, 건강한 생태계)도 더 파괴된다. 이런 상황에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을’ 시간도 점점 사라지고 설사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더라도 그 재료가 얼마나 건강할지도 의심스럽다.
셋째, 이 책처럼 인간 행복의 소박한 결론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으로 축소하는 건 자칫 사회 행복의 차원을 도외시한 채 개인 행복만 추구케 하는 ‘의도치 않은’(?) 태도를 낳는다. 생각건대, 동학농민혁명 이래 ‘사회 행복을 증진해야 개인 행복도 증진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결코 자신의 생존과 번식만 도모하진 않았다.
그래서 묻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이라 여기는 이들이시여, 사회 행복을 위해 건강과 목숨, 가족도 팽개치고 희생한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조금이라도 기억하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