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연장, 방앗간

전광진

악양면
집 앞 개울 건너에 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늦은 가을, 타작이 시작되면 온 동네 경운기와 짐차들이 들락거리느라 왁자하던 곳. 수레에 나락 가마를 싣고 오거나, 또 한두 사람 지게를 지고 오는이 마저 있던 곳입니다. 방앗간 앞마당에는 나락 가마니가 처마에 닿을 듯 쌓였습니다.
어느 시골에서든 농사짓는 사람들이 농사일로 왁자하게 모이는 일이 거의 없는 때에, 해마다 타작 무렵 방앗간만이 온 마을 농사꾼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묵혔던 소식들도, 결국은 방앗간에 모였다가 마을 여기저기로 실려 나갔습니다.
그랬던 것이 몇 해 전 방앗간이 헐렸습니다. 마을 앞길을 넓히는 공사를 한다고 했고, 길 넓히는 자리에 방앗간 터가 들어갔습니다. 오래되고 낡은 방앗간은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이제 악양에 남은 방앗간은 하나였습니다. 지난 여름 저는 마지막 남은 악양의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빻았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악양에는 이제모든 방앗간이 문을 닫았습니다.
악양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대축 방앗간의 모습
악양에 남아 있던 방앗간들은 밀가루도 빻고, 보리 방아도 있는 집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것은 밀 방아, 보리 방아까지 있는 작은 마을 방앗간은 전국을 뒤져야 손에 꼽을 만큼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악양의 방앗간은 벼를 타작하는 가을 말고도, 밀과 보리를 베는 초여름에도 북적였습니다.
밀이나 보리나 다른 잡곡 농사는 방앗간이 없으면, 지을 수가 없습니다. 논농사를 조금만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논 몇 마지기라도 밀농사를 지으면, 그 많은 걸 집에서 가루를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제분 공장에 들고 갈 만큼은 안 되지요. 그래서 방앗간이 헐리고나서 밀 농사 짓는 집이 많이 줄었습니다. 방앗간이 있어서 자연스레 토종밀 종자가 내려오던 동네였습니다만, 방앗간이 모두 사라졌으니, 밀 농사 짓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밀, 보리뿐만 아니라 수수나 조, 메밀 같은 것도 마을 방앗간이 있어야 그때그때 해마다 사정을 봐 가면서 농사를 줄이고 늘리고 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러니 방앗간이야말로 마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농사는 그야말로 방앗간만이 마을 농사를 떠받칩니다.
읍내에는 이제 자율 주행 버스가 다니고, 새로이 의료원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옛날 하동역 자리에 들어선 어린이 생태 놀이터는 순천이나 전주의 이름난 놀이터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도로 표지판 같은 것을 세워 놓아도 좋을 텐데요.) 컴팩트 매력도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정책들은 하동에서 살아가는 것에 활기를 불어넣을 만한 것들입니다. 여기에 더 보태고 싶은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서, 새로 꾸리는 하동의 거점에 공공 방앗간 같은 것이 하나씩 들어서면 좋겠다 싶은 것입니다. 면소재지에는 일본의 시골에서 보았던 자판기식 정미기도 하나씩 두고요. 저는 올해에도 나락을 베고 밀을 갈았습니다. 이 밀을 벨 때쯤 가루를 낼 만한 방앗간이 가까이에 생기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