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에서 모인 경주김씨 종친회 회원들과 유림들이 춘향대제를 준비하고 있다.
왼쪽부터 초헌관 김진우 씨, 아헌관 김기동 씨, 종헌관 김구연 씨
지난달 3월 19일 경천묘 춘향대제(春享大祭, 이른 봄에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큰 제사)가 청암면 평촌리에 있는 경천묘에서 봉행되었다. 경천묘는 경순왕을 모신 사당이며 경순왕의 어진(초상화)이 모셔져 있다.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원본을 본따 그린 작품 5점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경천묘에 모셔져 있는 이 작품은 임금의 어관을 쓰고 한편으로는 신하의 예를 갖추는 홀을 양손에 쥔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제작시기는 세밀한 필치와 음영이 표현된 채색 등의 묘사와 화풍으로 보아 1677년 이후로 추정되나 소실되고, 이 어진은 19세기에 다시 한번 더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경천묘는 경순왕 어진이 봉안된 경모당과 이색, 김충한, 권근의 위패가 봉안된 금남사와 관리사, 그리고 출입문인 읍양문과 홍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천묘는 경순왕의 어진이 모셔져 있어 경남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평촌리 경모당에 모셔져 있는 경순왕 어진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신라 마지막왕이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이미 후백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국토 대부분을 잃고 민심도 떠난 최악의 상황이었다. 신라를 둘러싼 정세가 더는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자, 경순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더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며 고려에 국권을 양도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을 우대하고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을 시키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에 넘겨준 뒤 용화산 학수사(강원도)에 머물렀고 사후 그곳에 사당을 지었으나 후세들이 경북 경주로 옮겼다. 경주김씨 문중은 경주 숭혜전에 모셔진 어진을 1903년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에 경천묘를 지어 모셔 왔다. 청암면 중이리 일대가 하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1988년 지금의 장소 평촌리로 이전했다. 경천묘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금남사에는 목은 이색과 수은 김충한, 양촌 권근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원도 원주 경천묘에서 경순왕의 어진을 모신 이색과 권근의 정성에 보답하고 그 뜻을 유지하기 위해 1918년 지역 유림이 이 금남사를 건립했다. 경천묘 춘향대제가 봉행되는 때와 발맞춰 금남사에서도역시 제사가 올려진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
2018년부터 경천묘 춘향대제 내임을 맡아온 김규섭(81) 씨는 “그동안 종친회와 참석한 분들의 찬조로 진행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도, 군의 제수 보조비가 나와 다행”이라 말한다. 또 “건물이 오래돼 보수할 곳이 생기는데 지금도 경모당 대청마루가 내려앉았다. 무엇보다 수로가 경모당 정면을 지나가고 있어 지하로 통과하는 공사를 하는 게 급선무이긴 하지만 공사비가 적잖게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매년 꾸준히 전국에서 90-100명 정도 참석하는데 참석한 분들에겐 약간의 교통비를 지급하여 제를 지낸 의미를 함께 나누고 있다고 한다.
경순왕의 어진을 모신 이색과 몇몇 신하들의 정성에 보답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금남사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같은 시각 경천묘 바로 아래 금남사에서 봉행된 이색과 두 분의 제에서 집례(사회)를 맡은 이영근(73) 씨는 “그동안 제사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아왔지만, 집례를 해보니 제사의 전체적인 의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것은 전통을 지키고 자신의 뿌리를 존중하는 일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비록 국권을 넘기긴 했지만, 하늘 같은 백성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 피를 보는 전쟁 대신 평화를 택한 경순왕의 ‘애민’ 사상은 후손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차마 백성이 피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던 경순왕의 백성 사랑은 오늘날에도 지도자라면 누구나 본받아야 할 첫 번째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