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 혼란한 시대를 돌파하는 법, 중독 이론

12·3 쿠데타도 이상했지만, 그 이후 처리 과정 또한 참 이상하게 흘러왔다. 헌재에서 내란수괴 윤석열을 마침내 파면하는 걸로 끝날 일만은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중독 이론’이란 걸 들여다본다.
중독 이론은 원래 개인 중독자의 ‘이상한’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나왔다. 일례로, 마음의 고통(외로움, 괴로움, 두려움, 공허함 등)이 심한 사람들이 그 고통을 달래고자 알코올에 상습적으로 의존하면 갈수록 도수를 높여 나간다. 강박적 의존과 내성 증가가 문제다. 만일 이 사람이 술을 끊으면 금단증상(손 떨림, 머리 아픔, 무기력, 불안 등)으로 괴로워 또다시 술을 마신다. 그러면 일시적이나마 고통을 잊고 쾌감을 느낀다. 이게 중독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되는가?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우리는 폭력이나 끔찍한 경험과 마주친다. 어린 아이의 경우, 부모나 어른의 ‘조건 없는 사랑’이 결핍되면 이것이 아이에겐 폭력 내지 끔찍한 경험이 된다. 이 폭력적 상황이 당사자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상처(트라우마)를 남긴다. 이 상처와 함께 붙는 것이 두려움(공포)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배제에 대한 두려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낙인에 대한 두려움, 차별에 대한 두려움, 뒤처짐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알고 보면 누구나 이런 저런 두려움에 ‘쩔어’ 산다. 모두, 폭력 내지 결핍된 사랑의 결과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결코 유쾌하지도 않고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도 않다. ‘겁쟁이’ 또는 ‘나약함’이라는 낙인이 두렵기 때문!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억압, 회피, 은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충동은 강렬한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왜곡된 생명 욕망으로 나타난다. 즉, 한편에선 두려움 회피 욕망이, 다른 편에서는 왜곡된 생명 욕망이 결합, 마침내 중독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일례로, 알코올 중독은 (괴로움 내지) 두려움 회피 욕망과 더불어 쾌감 추구 욕망이 결합돼 나타난다. 또, 일중독은 (낙오와 배제의) 두려움 회피 욕망에다 (성과나 능력) 인정 욕망이 결합해 생긴다.
이런 개인적 중독 이론을 조직이나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조직이나 사회 전체가 개별 중독자처럼 행위(느낌, 생각,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윤석열과 연관된 정부조직, 검찰 조직, 법원 조직이다. 정부 조직은 (알코올 중독자이자 권력 중독자인) 윤석열의 눈치를 보며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시기에도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치만 보았다. 검찰 조직 역시 윤석열의 검찰 당시에 더욱 중독 조직이 되었다. 말로는 ‘법과 원칙’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돈과 권력’에 따라 움직였다. 이상한 행위를 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정상’이라 믿고, 비판자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했다. 언론은 동반중독자(공범)가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법원 조직들조차 중독 조직이 되었다. 내란 수괴를 ‘탈옥’시키거나 윤석열 탄핵 선고도 한 달 이상 지연한 것은 칼칼한 ‘제정신’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최고 학부를 나오고 고시를 통과한 전문가들이 ‘법과 양심, 원칙’에 따른 판결도 단호히 내리지 못한다면 그 누가 신뢰하겠는가? 그동안 부정부패와 무능, 무책임과 직무유기, 직권남용 등의 죄가 명백해도 감사원장, 일부 검사들, 국무총리까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다니!
그나마 2025년 4월 4일, 헌재가 전원 일치 의견으로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고함으로써 체면 유지는 했다.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이는 수백 만 국민들이 매일 또는 매주 광장에 나가 외침으로써 이룬 성과이지, 법 전문가들의 단독 결론은 아니다. 깨시민의 광장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검찰 캐비넷을 두려워하는 법관들이 어떻게 ‘감히’ 대통령을 파면했겠는가?
이런 점에서 탄핵 이후 우리가 만들 세상은 중독 개인, 중독 조직, 중독 사회를 청산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 건강성’ 회복을 위해선 우리가 무엇에 어떻게 중독돼 사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또 외친다, “내란당을 칼컬케* 청소하자!!!” *칼컬케: 깨끗하게, 깔끔하게(경상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