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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희다

나는 서희다

어미 떠난 별당, 햇살은 따스한데
연못의 물은 점점 얼어만 가고
다섯 살 내 마음의 옹이는 자꾸 딱딱해지고
앞뒤 없이 울어대던 산새 소리
숨구멍마다 돌이 박혀 서걱거렸지
엄마 데려와, 엄마 데려와...
울부짖고 까무러치던 나의 가슴은
진정 무엇을 품으려고 했을까?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 삶의 길은 정해져 버렸구나
내 안에 반짝이던 별
그 빛을 언제 잃었는지 나도 모르고
나의 웃음은 어디 있었을까
고소산성 밤길 더듬고 간 엄마는 알았을까
할머니도, 아버지도 몰랐을까
길상아, 봉순아, 오광대 얼굴에는 비치더냐
온몸 묶은 사슬이 풀리고
광복의 옷고름이 평사리에 펄럭일 때
나는 내 웃음이 설움인 줄 겨우 알았다
어깨에 쏟아지는 시리우스 별빛처럼
나는 백합이었다
외줄기로 직립하는 줄기
어떤 빛깔도 밀어내는 흰 꽃잎과
가늘고 긴 꽃대에 오로지 한 송이 꽃
아름다워도 가까이할 수 없는 독한 향기였다
나는 도라지꽃이었다
서리를 이고 내린 뿌리는
해마다 목덜미에 주름이 늘고
저녁이면 꽃봉오리에 그리움을 담아
보랏빛으로 오므리고
나는 탱자나무였다
어미의 첫날밤 족두리에서 키운 가시
아비의 기침 소리에 앙칼로 덧나고
봉순이를 긁고 길상이를 긁고
귀녀의 얼굴, 병수의 등을 할퀴고
북간도 눈보라에 억세고
굵어진 가시투성이 나무였다
봄을 건너뛴 내 몸
치렁치렁 비단옷으로 감싸고 덮어도
송곳처럼 도드라지는 가시들,
바늘 한 땀
바람 한 줌 들이지 않는 탱자나무였다
나는 수레바퀴였다
멈출 수 없는 길을 굴대 하나로 달렸다
수많은 바퀴 자국이 닳고 닳아도
흙먼지 툭툭 털고 다시 굴렀다
터널 끝, 저기 하동 평사리
뽀얀 먼지 털어내고 멈춰질까 했는데
나는 기러기였다
타국 땅에 지쳐 날아온 여기 섬진강 포구
이제는 깃을 내리고
어디 한 곳 누긋하게 앉을 데가 없어
빈 하늘을 빙빙 돌고 있는
나는 여전히 외기러기다
그래서 나는 겨울 들판이다
다시 찾은 평사리
들머리 자운영은 서리꽃이 되었고
마른 볏짚은 엎어져 헝클어지고
불러도 닿지 않는
오랜 고향과 그때의 사람들,
나는 살아서 빈 들판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사만 장 원고지에 다 채울 수 없는
아무리 절절해도 주인공은 아니다
그 시절,
슬픔이 있어도 눈물이 없고
기쁨이 있어도 웃음이 없던 시절,
고향이 있어도 꿈처럼 타국을 헤매고
이웃이 있어도 별처럼 흩어져 살았지
오뉴월에 숨을 쉬어도
가슴에는 찬 바람이 들고
사랑도 사랑인 줄 모르고 떠밀려 온 세월,
나라 잃은 칠백 명 여느 등장인물들
온몸에 사슬 감고 휘청거리던 민초들
책 속에 머물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온 백성들, 그들이 모두
스무 권 대하의 우뚝한 주인공이라면, 나도
관음보살처럼 거대한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