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만들어 줄게.”
학창시절 무언가 필요해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하면 아빠가 으레 하던 이야기다. 그게 그렇게 싫었다. 친구들이 다 알 만한 요즘 유행하는 새것이 갖고 싶다는 뜻인데 아빠는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뭔가를 자꾸 직접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어떤 건 직접 만들어주시기도, 어떤 건 결국 사기도 했고 어떤 건 포기하기도 했다.)
아빠의 책장에는 <핸드메이드 라이프>와 <자발적 가난>이라는 책이 오래 꽂혀 있었고 내가 아주 어린 아이일 때부터 아빠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었다. 오디오와 스피커, 선반과 식탁, 방석과 커튼, 집과 정원. 삶의 어느 시기에 아빠는 천연 염색가였고 목수였고 건축가였다. 아빠는 이웃 예술가들을 모아 ‘손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협회를 만들고 마을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제 환갑이 훌쩍 넘으신 아빠는 20년차 도예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아빠는 나보다 고작 서너 살 많은 청년이었고 그때의 아빠와 또래가 된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자꾸 손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두 동강 난 밥그릇 수선 중.

일본인 선생님께 아빠가 배우신 그릇 수선(일본어로 ‘킨츠키’라고 한다.)을 수년 전 아빠에게 내가 배웠다. 흙과 유약을 만드는 지난한 공정과 오랜 시간 나무로 불을 지펴 만든 아빠의 도자기가 금이 갔다고, 작은 구멍이 있다고, 이가 나가고 깨졌다고 버려지는 게 아까워 시작한 일이었다. 도예가의 입장에서야 그런 건 작품의 가치가 없다고 여기겠지만 쓰는 사람으로서는 조금 더 귀하게 여기고 싶었다.

깨진 그릇을 수선하는 것은 도자기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깨진 단면을 사포로 곱게 갈아 정리하고 천연 옻과 가루(돌, 나무, 곡물의 가루)로 접착제를 만들어 깨진 조각을 붙인다. 단단하게 굳으면 접착 단면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깨진 선에 옻을 칠해 마감한다. 이렇게 그릇 한 점을 수선하기까지는 최소 한 달, 길게는 반 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일본에서 시작된 킨츠키의 ‘킨’은 ‘금(金)’을 말하는데, 마지막 과정에 금가루 혹은 은가루를 올려 장식하는 하나의 ‘공예’이자 ‘깨진 그릇’이라는 불완전성을 킨츠키를 통해 완전하게 만들어내는 ‘수행’의 도구로 삼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단지 깨진 아빠의 그릇이 아깝고 귀해 오래 사용하고 싶을 뿐이다. 쓰다 보면 결국 떨어져 하수구로 흘러가버릴, 그래서 손이 덜 가고 설거지도 조심스레 하게 만들 금가루는 올리지 않고 옻칠로 마감을 끝낸다. 물건이 가장 잘 살려지는 방법은 오랫동안 잘 쓰는 거니까. 요즘은 저렴하고 품질 좋은 물건을 쉽게 얻을 수 있고 깨지거나 싫증이 나면 새 물건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다. 어느 날엔 천 원짜리 몇 장이면 살 수 있는 공장에서 만든 그릇을 몇 달에 걸쳐 수선하게 되기도 하는데, 아빠의 도자기를 수리할 때와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물건을 오랫동안 잘 쓰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드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어쩌면 쓰는 사람도 행복하지 않은 물건을 끝없이 만들어내고 구매하게끔 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릇 수선을 하나의 수행이라 이름 붙여도 될까. 눈과 어깨와 손가락 관절이 허락하는 동안 무언가를 손으로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고쳐 쓰고 되살려 쓰는 사람으로, 숨막히는 물건의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아빠의 그릇으로 가득한 그릇장 곳곳에 깨지고 이 나가 옻으로 ‘땜빵’하고 이어 붙인 그릇들이 늘어간다. 설거지를 하다 그릇이 깨지면 괜히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