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직접 만들어 입은 옷은 광목으로 만든 주름치마였다. 온라인 쇼핑몰을 헤매다 마음에 드는 치마를 발견했는데 ‘이렇게 단순한 치만데, 이렇게 비싸다고?’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만드는 것에 겁이 없던 나는 책을 찾아보며 주름치마 만들기에 도전했다. 왠지 어색하게 만들어진 이 치마를 몇 번인가 입다가 불편해서 잘 입지 않게 되었다. (편안하고 좋은 옷을 만들려면 그만큼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옷 만들기를 배우며 알았다.) 그 뒤로도 몇 벌인가의 옷을 더 만들었다. 어떤 것은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져 여전히 입고 있기도 한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옷을 더 이상 만들어 입지 않게 되었다. 이미 나의 옷장에 있는 옷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체형이나 취향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옷으로도 평생 입고 살 수 있다.

되살림 바느질 워크숍에서 각자의 ‘빵구’를 메웁니다.
그때부터는 새 옷을 만드는 바느질 대신 낡은 옷의 쓰임을 되살리는 바느질을 시작했다. 오래 입어 헤진 린넨셔츠, 청소하다 세제가 튀어 색이 바란 티셔츠, 구멍 난 양말, 넘어지며 무릎이 찢어진 바지, 음식을 흘려 얼룩진 테이블보와 화장품 자국이 묻어 지워지지 않는 손님용 침구까지. 여기저기 찢어지거나 오염되어 더 이상 입기 어려워진 옷에서 얻은 조각을 덧대거나 새롭게 직조해 메우고, 꿰매고, 이어 붙였다.

낡음이 추억이 되도록 되살려 입는 청난방.
11년째 입고 있는 청남방은 되살림 바느질로 수선한 곳이 하나둘씩 늘어나 6곳이 되었다. 처음 찢어진 곳을 덧댄 것을 보면, 어수룩하지만 작년에 직조로 수선한 자리를 보면 꽤 그럴싸하다. 그사이 되살림 바느질 능력도 쌓여갔다. 어제 고사리를 따다 가까이 있는 두릅나무 가시에 걸려 팔이 찢어졌으니 수선한 자리는 곧 7곳이 되겠다. 6년 전 민박집을 열며 희디흰 광목으로 시작했던 테이블보는 수많은 손님이 식사하며 생긴 얼룩을 가린 조각들로 가득하고, 오래 써 낡은 숙박객용 소창수건은 이제 주방 행주가 되었다.

얼룩이 묻은 손님용 침구에는 좋아하는 조각 원단을 덧붙여 되살려 씁니다.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되살림 바느질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과 사건이 만들어낸 구멍과 상처와 흔적을 되살려 바느질하고 나면 오히려 손이 더 자주 가는 옷과 물건이 된다. 되살림 바느질 워크숍을 열면 친구들이 가져온 각자의 ‘빵꾸’와 ‘흔적’의 사연이 모인다. ‘어떻게 하면 버리지 않고 되살려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며 머리를 맞대고 되살릴 방법을 찾아 각자의 바느질을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바늘과 실을 쉴 새 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전보다 더 소중한 옷이 되어버린다. 바늘과 실이 낡은 옷에 애정을 꿰어낸 걸까?
옷을 쇼핑하며 얻는 쾌감을 안다. 20대 초반을 검소한 공동체에서 지냈던 나는 20대 후반, 그 동안 입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사며 ‘날 위한 선물’이라는 만족감에 홀랑 빠지기도 했다. 거기에 ‘트렌드’를 따른다는 멋짐이 조금 더해졌던 것도 같다. 하동으로 이사 온 이후로 도시의 옷가게에 진열된 옷을 보며 이런 우스갯소리를 한다. “내가 이거 입고 어디 가겠노?”
집과 산과 밭을 오가는 나의 일상엔 통풍 잘 되고 튼튼한 옷이 딱이다. 적량과 읍내를 오가며 만나는 친구들이 되살려 입는 옷의 멋을 아는 덕분에, 이제 7번째 꿰맨 나의 오래된 청남방이 ‘트렌디’한 옷이 되기도 한다. 필요한 옷이 생기면 친구에게 입지 않는 옷이 있는지 묻거나 악양으로 간다. 깨끗하고 예쁘지만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을 악양 ‘모두의 가게’에 있는 ‘모두의 옷장’에 가져다 두고 필요한 옷이 있으면 저렴하게 사 온다. 이렇게 가지고 있는 물건을 되살려 사용하며 지내온 나날을 겪으며 ‘새로운 물건을 쇼핑하지 않아도 풍족한’ 기쁨을 알게 되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