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생태해설사, 악양면
8월부터 나무 이야기를 쓰기로 약속했는데 어느 나무부터 시작할까? 그 나무들이 숲을 이룰 때까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식물조사 차 ‘지리산 옛길’, 일명 ‘서산대사길’을 걷게 됐다. 가슴에 시원한 계곡바람이 불었다. 여기야. 바로 이곳! 나는 솟구치는 기쁨에 박수를 쳤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 가는 숲과 나무, 그리고 길 이야기였다.
서산대사길은 지리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화개천을 옆으로 하고 걷는 4.2km의 지리산 옛길이다. 서산대사(1520~1604년)라면 불교에 관심이 없어도 공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억불 정책으로 쇠락해가던 불교를 중흥시킨 조선 중기 고승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5000 여명의 승병을 조직하여 제자들(사명대사 등)과 함께 왜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단다. 당시73세. 놀라워라! 1540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무렵, 의신마을 원통암에서 출가하였다니, 이 길은 그의 포행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여 지리산 옛길을 ‘서산대사길’로 명명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의신마을 토박이, 별천지 생태관광협회 정봉선 대표님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길은 의신마을에서 끝나지 않고 그대로 계곡 옆길을 따라 의신마을 더 깊은 곳에 있는 삼정마을로 이어져 벽소령으로 연결되는 길이 었단다. 봇짐, 등짐장수들이 소금과 해산물을 벽소령 고개 넘어 함양으로 팔러 가던 길, 의신마을 주민들이 산나물과 참숯을 팔기 위해 화개장터로 가던 길이었다. 그 길 위 주막에서는 막걸리와 국밥이 있었고 봇짐장수를 따라 왁자지껄 흘러다니는 이야기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도로가 생기고부터 주막이 사라지고 인적이 끊겼다. 옛길을 복원했지만 섬휘파람새 울음소리가 숲을 울려도 사람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한적하다. 이렇게 좋은 숲길이 비밀스레 몸을 숨기고 있다. 지금은 여름이라 신흥마을 입구 쪽 계곡에서는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오골오골했다.
하동을 소개할 때 나는 꼭 이 길을 말한다. 나같이 하체는 굵으나 오르막길에 약한 근육을 가진 사람도 어렵지 않게 걸을 만큼 난이도가 높지 않다. 4계절 다 걸어보았지만 어느 계절이라도 좋다. 친정어머니가 70대 중반이었을 때 온 가족이 걸은 적 있다. 걷기 좋아하는 식구답게 쉬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2시간만에 다 걸어버리고는 더 걸을 길이 없어 아쉬워했다. 계곡을 만났다 헤어졌다 하기에 숲과 물을 좋아하는 이라면 춤추며 걸을 수 있다. 조금 더 편하게 걷고 싶다면 의신마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원규 시인이 화개에 살 때 지리산 옛길을 놓고 시를 썼다.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이다. “온종일 의신동천 물소리로 내장을 헹구러 가자/모세혈관마다 연초록 바람이 이는 지리산 옛길로 가자.” 가자!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길, 보부상 길, 의신주민 길을 걸으며 나만의 이름을 지어보자. 그 길을 오간 이야기와 땀방울을 상상하며 푸근한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보자. 나무와 더불어 숲이 되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