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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고향은 엄마의 눈물

전화벨 소리가 났다.
“내일 주말인데, 너희들 뭐해?” 엄마다!
“아, 우리는 내일 케이블카 타러 가려고 해요”
“내일 무슨 날인데, 기억하고 있나?” 엄마가 다시 물었다.
“기억하고 있지, 아빠 생신이잖아, 엄마는 뭐해?”
“오전에 곡식 수확하고, 오후에는 내일 아빠 생신상 음식 재료를 사러 가야겠다”
“동생네는, 이번 아빠 생신에 온대?”
“올해는 못 온다고 하네. 참, 너희는 올해 설에 올 수 있나? 미미가 8개월 때 왔었는데… 미미가 벌써 6살이라니,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싶네!”
엄마의 울컥한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미미를 낳기 전까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엄마는 외할머니 집에서 6남 1녀 중에 둘째로 태어나셨다. 유일한 딸이지만 외할아버지께서는 엄마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늘 일만 시키셨다. 외삼촌 6명은 모두 학교에 보내 교육을 시키셨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엄마는 남존여비 사상이 너무 강하셨다. 그런 이유로 딸인 내가 장녀로 태어나자 많이 실망하셨고 나를 많이 원망하셨다. 둘째로 남동생이 태어나고부터 엄마는 심하게 남동생만 편애하셨다. 내가 한국으로 시집을 온 것도 엄마에 대한 원망이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에게 섭섭한 것이 너무 많았고, 반항도 많이 했고 엄마를 미워했다. 늘 엄마를 멀리했고 학교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택해서 다녔다. 결국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의 결혼식에 부모님을 초청했지만 두 분은 오시지 않았다. 아들을 낳은 후 10년 만에 어렵게 얻었던 귀한 딸이 태어났을 때 엄마는 모국에 있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나에게 와 주셨다. 내가 너무나 그리운, 한국에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엄마의 손맛이 들어 있는 고향 음식도 많이 해주셨다. 그러다 엄마는 미미가8개월이 되었을 때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셨다.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에 쉽게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안 듣고 싶은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다투고, 보내고 후회할 것 같아 화해하고 그러다 또 다투고 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하며 지냈다. 후회도 많고 서운함도 많고 나는 엄마를 보내고 한참을 우울하게 지냈다. 평생에 만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엄마가 살아왔던 환경 때문에 굳어진 생각을 쉽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내 생각을 내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내 엄마, 못 본 지도 5년이나 되었다. 내년에는 꼭 고향에 가봐야겠다. 고생만 하시는 내 엄마를 꼭 보러 가야겠다. 고향은 엄마의 눈물이다. 늘 내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루원리

중국 내몽고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이며 무명작가다. 박경리 토지백일장 다문화부 장원, 일반부 장려상, 양철북 편지쓰기 은상, 매일신문사 주관 글쓰기 가작상, 숙명여대 아시아연구소 주관 글쓰기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청암면에 살고 있으며 하동군 가족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2022년 11월 /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