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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량면 죽치마을 왕버들 -‘숲과 나무, 길 이야기’ 2

적량면 면소재지인 죽치마을 앞을 흐르는 강화천가에 덩그렇게 자리잡은 왕버들을 마을 사람들은 ‘물버들’이라고 불렀다. 토란 줄기를 다듬으며 들려주신 이순자(80세) 씨의 말씀으로는 저 위쪽 우계에서부터 하천 따라 흘러오다가 여기에 자리 잡았단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버드나무는 그런 식으로도 살 가능성이 있다.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 했던, 그러나 한때 하동문화원 향토문화사 연구위원이었다는 어르신, 나는 그 어르신을 향토사학자라고 부르겠다. 이 향토사학자의 말씀에 따르면 1916년 <노거수 명목지>라는 책에도 죽치마을 왕버들은 지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1982년 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200년으로 추정된 수령보다 훨씬 더 오래된 나무일 거라고 예상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된 어르신들도 안부를 묻는다는 왕버들.
버드나무 이야기를 하니 생각난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해야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주인공 히포크라테스는 BC 400년 버드나무 껍질을 가루 내어 처방한 최초의 의사였다. 버드나무 껍질 속에 있는 살리신이라는 성분이 몸 안에서 화학물질인 살리실산으로 변하여 두통을 포함한 통증을 멈추는 약으로 쓰였다. 그러나 한 가지, 위장에 좋지 않은 단점이 있었다. 이를 1800년대 독일의 화학자가 사람들이 복용하기 쉽도록 산의 형태를 약간 바꿔 만든 것이 아스피린으로 알려진 아세틸살리실산이라고 한다. ‘아프면 버드나무 껍질을 너무 많이는 말고 조금만 씹으면 효과가 있다.’는 처방을 대대로 전해왔던 우리 조상들은 이런 사실을 이미 예전에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버드나무 꽃가루가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오해를 바로잡고 싶다. 봄철 하얗게 뭉쳐서 날아다니는 건 버드나무 꽃가루가 아니고 씨앗을 둘러싼 솜털이다. 그 시기 얼마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알레르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다만 참으로 희귀한 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봄마다 버드나무류의 연둣빛이 움틀 때면 그 사랑스런 빛깔에 취하는 사람이 많다. 그걸 ‘연둣병’이라 불러야겠다. 연둣병을 일으키는 주범인 왕버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죽치마을 어르신들의 왕버들에 대한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꼬맹이 시절 죽치마을 아이들은 왕버들 가지에 올라서서 하천으로 다이빙을 하며 놀았다. 시멘트 ‘보’가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지만, 물이 명경같이 맑고 깊었단다. 그때 다이빙을 위해 올라탔던 가지는 세월의 무게에 사라지고, 이무기가 숨어있다는 썩은 둥치 속은 메워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거기 이무기가 지키고 있어 아직까지 그 주변에서는 사고 한번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 꼬맹이들은 이제 칠십, 팔십이 넘어가고 있다. 향토사학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물버들(왕버들)은 우리 마을 ‘향토애수’라. 고향 떠나 사는 선배들이 가끔 전화를 해. ‘물버들은 잘 있나?’ 하고. 사람 안부보다 물버들 안부를 먼저 물어.”
향토사학자는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왕버들을 지킨 분이다. 2003년 태풍 매미 이후 하천 정비 공사 계획 속에는 왕버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나무 근처에 사는 향토사학자가 미리 알고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지킴이 나무를 절대 베면 안 된다.”고 계획을 변경하게 만들었다. 나무가 죽는다고 나무 아래는 시멘트 미장도 안 된다고 말렸다. 결국 나무를 베지도, 나무 근처에는 시멘트 포장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감사한 일이다.
수령이 200년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적량의 왕버들. 성인 네 명이 둘러싸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웅장하다.
왕버들을 처음 만나던 날 둘레를 재기 위해 함께 있던 친구 네 명에게 왕버들 둘레에 서서 팔을 뻗어 안아보라 했지만 네 명으로는 도저히 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둥치 앞에 서 보라고 했더니 4명이 모두 붙어 서서 나무 한 면을 겨우 가릴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우산모양의 가지 또한 풍성하고 건강했다.
죽치마을 이장(이순화, 72)은 이 좋은 나무를 방치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방치하지 말고 잘 보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간절한 마음을 전하셨다. 저 나무가 저 자리에서 다시 이백 년을 더 살게 됐을 때 이 땅은 어떻게 돼 있을까 궁금하다. 그때도 나무의 둥치를 재기 위해 팔을 벌리고 서서 손을 잡을 사람이 있을까?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껍질에 녹아있고, 노거수라면 응당 그렇듯 웅숭깊은 사연이 나이테 속에 차곡차곡 새겨져 있을 것 같은 적량면 죽치마을 왕버들을 만나고 돌아오며, 나는 그래도 감사했다. 아직 친구가 있고 왕버들이 있고 마을도 있다.
정명희. 생태해설사, 악양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