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산 37-3번지. 남원사매 일반산업단지의 옛 주소다. ‘산 몇 번지’라는 주소로 그곳이 예전엔 산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평지보다 높이 솟아있는 땅의 부분. 지금 ‘월평리 산 37-3번지’는 더 이상 산이 아니다. 시멘트 블록이 바닥에 촘촘히 박혀있는, 어떤 굴곡도 허용하지 않는 평지다. 산 두 개가 평평하게 깎이고 깎여 그렇게 남원사매 일반산업단지가 만들어졌다.
1000억이 넘는 공사비가 투입된 사매일반 산업단지가 완공된 지 3년이 지났다. 개발을 주도한 이환주 전 남원시장은 남원 시민들에게 ‘3500개의 일자리와 연간 25억 원의 지방세 수입’을 약속했다. 남원시는 분양전문업체까지 두고 분양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입주한 기업은 현재 두 곳뿐이다. 지금은 남원시의 최대 골칫거리라고 한다.
얼마 전 기자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남원 다크투어’란 팀을 급조해 사매일반 산업단지를 찾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산이었을’ 그곳의 옛 모습을 그려보았다. 따가운 봄 햇살을 잠깐이라도 피할 수 있는 나무도, 바위도 아무것도 없었다. 산을 상상해 볼 수 없었다. 남원에 오래 산 분의 친절한 설명을 들어도 쉽지 않았다. 과정을 모른 채 결과만을 마주하니 상상력이 빈약해졌다.
규모와 사업의 성격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남원의 경우와 같은 일은 전국에 너무 흔하다. 하동군도 마찬가지다. 20년간 4369억 원의 빚을 남긴 갈사·대송 산업단지가 그렇다. 군수가 세 번 바뀌었지만, 답답한 상황은 여전하다. 너무 오랫동안 지지부진한 채로 방치되어 군민들의 관심에서도 한참 멀어져 버렸다. 갈사·대송 산단 문제는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답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국제적인 보호종이자 국내에서도 천연기념물,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받고 있는 흑두루미 수백 마리가 갈사만을 찾았다. 좀처럼 드문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했다. 본지에서도 신년호 1면 첫 기사로 다루었다. 흑두루미는 본능으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았다. ‘어쩌면 길을 잃은 우리에게 갈사만의 예전 모습을, 아니 오래된 미래 같은 앞으로의 갈사만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아닐까’ 하고 괜한 의미를 부여해 본다.
4월이다. 햇살이 밝고 따뜻하다. 사방천지가 꽃이다. 이 좋은 날에 꽃놀이도 물론 좋겠지만, 내가 사는 지역을 살펴보는 다크투어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하동이라면 역시 갈사만 쪽이 좋겠다. 그곳에 가면 무섭게 매연을 뿜어내는 하동화력발전소의 굴뚝을, 생활쓰레기 처리장의 쓰레기산을, 삶의 터전이 망가져가는 것을 천천히 오래 견뎌내고 있는, 생기를 잃은 주변의 마을들을 지나치게 될 것이다.
운이 조금 좋다면 갯벌에서 한가롭게 먹이를 찾는 저어새를 볼지도 모르겠다. “저어새의 안위를 저어하다(‘걱정하다’의 옛말)”라는 말장난에 웃어줄 친구들이 동행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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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찾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