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다시피 소설 『토지』는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부는 1897년 한가위 날을 시작으로 1908년 그러니까 서희가 16살이 되던 해에 평사리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기까지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일본의 조선 내정 간섭이나 외교권 강탈 등으로 민족의 자주성이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평사리 마을의 상황도 시대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지요. 조선이라는 봉건시대에서 대한제국의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 격동이었습니다.
그러한 격변의 시대를 우리 민족이 스스로 일으키고 헤쳐나가는 과정이었다기보다는, 외세, 특히 일본에 의해 아닌 밤중의 홍두깨로 얻어맞은 피동적 혼돈이라서 조선의 위정자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민중들도 삶의 갈피를 못 잡고 다만 허우적거리며 우왕좌왕 목숨만 이어가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소설 『토지』 1부의 후반부에서, 최치수의 살인 사건과 극심한 흉년, 전염병으로 인한 무차별한 사망, 평사리 사람들의 최참판댁 습격, 친일분자 조준구 암살 시도, 서희 일행의 어쩔 수 없는 간도 이주, 등의 긴박한 상황 전개로 이러한 시대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들
어느 하나 편치 않았던 갈래길
납덩이 같은 추 하나씩 달고
길을 나섰다
다시 돌아올 길이었기에
애써 가벼워했다
"살아만 있으면 되는 기라 “
떠난다고 덜어지는 게 아니다
길은 또 다른 시작일 뿐
떠난다고 가벼워진 게 아니다
-조준구
최참판댁 문간에 새앙쥐로 기어들어
토지문서 훔쳐 물고 평사리 호령하니
평사리 사람들 마른 낙엽처럼 일그러지고
-허윤보
곰보 얼굴이 팥죽 끓듯 꿀렁거린다
"부모가 죽어도 통곡하거늘
나라가 망했으니 죽기살기로 싸워나 봅세
싸움은 배가 고파도 아니 되고 빈 주먹으로도 아니 되니
최참판댁 고방 탈탈 털고 안방 장롱 패물 싹싹 쓸어
소달구지 다섯 틀에 묵직하게 실어 봅세”
-길상이
왜놈 발바닥에 붙은 저 준구놈부터
새벽이 오기 전에 깔끔히 쥑이뿔고
토지문서 아씨께 찾아드리고 떠나야지
-삼수놈
재물에 눈이 멀어
사당 마룻장 뜯고 쥐새끼로 숨은 조준구를
찾아내고도 모른 척 살려주고
-서희
죽으라고 나를 버리고 간 길상이
입술 깨물며 별당 연못에 몸을 홱 던지려다
장롱 발 막대기에 할머니가 보이네
-봉순이
꽃가마 타고
서희 흔적인 척 꾸미고
구례로 혼자 간다
구불구불 산길
돌부리에 걸려 몸은 휘청이고
흐려진 시야는 돌아올 줄 모르고
-월선이
강청댁에 몰매 맞고
삼 장수 삼촌 따라 간도로 떠났었지
용정의 살림은 밑 빠진 독이라도
그저 님 곁이면 되었다네
아무 여한이 없는 하얀 분꽃처럼
-영팔이
떠나가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함이지
땅을 잃는다는 건 생명을 잃는다는 것
퉁포슬에 콩을 심고 만주벌에 깨를 심어도
나의 고향 나의 땅 평사리 무논으로
흰머리 휘날리며 돌아올 것이다
내 땅에 돌아와 호상으로 죽을 것이다
어두운 시절, 사람이야
어둠 따라 발을 떼고 떠나가도
토지는 황혼에 누워 보리를 지킨다
가거라 길상아 서희야 용아
가서 잡아당긴 듯 돌아보아라
압록강 건너며 섬진강 물소리 더 크게 듣고
용정 들에서 평사리 더 가까이 만나겠지
이별은 사람들 사이 헛소동이라
땅은 반도에서 대륙까지 한 몸,
국경이야 도마뱀 꼬리보다 못한걸
가거라 사람들아,
가서 늘어진 세월 따위는 여미고
보리 걷고 나락 피우고 기다리는 고향 터로
돌아올 땐 사람의 일이야 닳아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