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그릇, 구멍 난 옷, 낡은 집을 고쳐 쓰듯이 사람도 고쳐 쓸 수 있을까요? 사람도 고쳐 쓸 수 있다면 고쳐야 할 ‘사람’이자 고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앞서 쓴 세 편의 글과 달리 이번 글은 높임표현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릇이나 옷, 집은 그럭저럭 재미삼아 고쳐 써도 큰 문제가 없지만 사람은 대충, 그럭저럭 해서는 고쳐지지 않고 제대로 고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도 알아가는 중이기 때문에 자세는 낮추고 말은 높여 봅니다.

집도 사람도 고쳐가며 적량면에 살고있습니다.
사람도 고쳐 쓸 수 있다면 고쳐야 할 ‘사람’이자 고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바로 접니다. 무언가를 고친다는 것은 고장 난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제대로 되게 하는 것이고 바르게 고침으로써 본래의 목적에 맞게, 주어진 쓰임을 다 할 때까지 사용하기 위한 행위라 생각합니다. 물건이나 집을 고치는 것을 ‘수선’이라 한다면 사람을 고치는 것은 ‘수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대 초 처음 ‘수행’, ‘수행자’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낯설고 거창하게 들려 비장한 마음이 들었지만 수행이라는 단어를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은 일상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

나에게도 세상에도 이로운 일을 하려 노력합니다. 인도에서 재봉 수업 여성들과 함께
종교적 공간을 찾거나 스승을 찾아 일상을 벗어나 수행하기도 하지만 그건 특별한 배움의 시간일 뿐 결국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집, 마을, 지역에서 나, 가족, 이웃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수행의 장이 펼쳐집니다. 그렇지만 수행의 기회는 보물처럼 숨겨져 있어 깨어있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해 지나쳐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모든 순간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수행은 이런 것 아닐까요? 장 볼 때 “비닐봉투 안 주셔도 됩니다.”라고 말하기.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 들고 다니기. 가지고 있는 물건 고쳐가며 소중하게 잘 쓰기. 스스로와 가족, 이웃에게 다정하기. 짜증 나는 마음 알아차리고 가라앉히기. 섭섭한 마음 알아차리고 흘려보내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 알기. 하고 싶은 일보다 필요한 일. 이로운 일 하기. 다시 말하면 편리함과 즐거움을 좇아, 나와 세상을 해롭게 하는 생각의 습관대로 살지 않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수행을 통해 저는 고쳐지고 있을까요?
네. 고쳐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아주 더디게,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보다 더 늦은 속도와 짧은 거리일지라도, 여전히 짜증내고 섭섭하고 게으르고, 편하고 예쁜 것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일지라도 조금 덜 괴로운 사람,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생각합니다.
깨진 그릇 조각을 옻으로 이어 붙인 선이 늘어가듯, 찢어지고 오염된 남방에 꿰맨 자리가 늘어가듯이, 오래된 툇마루가 부지런히 쓸고 닦아 반질반질해지듯이 마음도 고쳐가며 살아가려 합니다. 부지런히 고쳐 살다 보면 매끈하고 반짝거리는 사람은 되진 않겠지만 단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연재한 네 편의 ‘고쳐 쓰는 생활’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쓰는 동안 부끄럽고, 기뻤습니다. 하동 어디선가 이웃과 반갑게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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