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면 회남재에서 5년째 ‘우곡 아리랑’이라는 문화공연을 계속해 오고 있는 행위예술가 우곡(64세. 적량)을 만났다.
우곡은 매년 봄부터 가을(3~11월)까지 금, 토, 일 3일간 회남재에 올라 차량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관객이 거의 없는 740m 고지에서 1인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관객의 호응과 갈채를 갈망하는 공연예술가의 일반적 특성으로 볼 때 그는 기이한 존재이다. 그의 관심은 대중의 열렬한 호응보다 자기표현의 완성에, 그의 만족은 관객의 박수갈채보다는 자기충족적 예술행위 그 자체에 있는 듯 했다.
회남재 행위예술가 우곡
기자(이하 김) : 2017년에 하동에 오실 때부터 회남재에서의 공연을 목적으로 오신 건가요?
우곡(이하 우) : 아니예요. 그때는 회남재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전에는 잠깐 가야산 쪽에 지인이 별장처럼 지어놨는데, 나보고 ‘네가 그런 분위기를 이제 원하는 대로 한 번 해 봐라’해서 거기 가서 한 2년 혼자 공연을 하면서 있었죠. 집이 조건이 너무 좋았는데, 공연을 못 하게 하더라고. 동네에서. 시끄럽다, 이거죠.
김 : 그 이전에는 그럼 다른 곳에서 이런 공연을 하셨어요?
우 : 아니에요. 연구만 했지. 이게(공연이) 이제 보실 때는 ‘그냥그냥 이렇게 하나 보다’ 이렇게 하는데, 여기까지 오기에는 근 30년 걸렸어요. 기본적으로 색소폰은 두 손으로 연주하는 악기예요. 한 손으로는 절대로 연주가 안 되는 거야. 한 손으로 연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표출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기까지가 25년 걸렸어요.
김 : 어떻게 여기로 와서 자리를 잡으신 거예요?
우 : 이게(우곡아리랑)이 완성이 된 지가 한 6년 됐어요. 현재 같은 컨셉의 공연이 완성이 됐는데, 이거를 세상에 내놓으려니 내놓을 곳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생소한 장르잖아요. 전혀 세상에 없던 장르고. 그러니까 어디 가서 공연을 하려 해도 이미 ‘여기서 하면 안 됩니다’ 그러죠. 그래서 이제 생각 끝에 정 할 곳이 없으면 산꼭대기 가면 된다. 그러다 5년 전에 하동군에서 제가 공연을 한번 했는데, 그게 인연이 돼 가지고 ‘나는 그냥 사람 하루에 다섯 명 이상만 있으면 된다. 화장실하고 전기 정도 쓸 수 있는 그런 데를 하나 추천해달라’ 그래가지고 여기(회남재)를 오게 된 거죠. 내가 한번 와서 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내가 찾던, 진짜 나한테는 천국과 같은 그런 곳이고, 여기가 이제 내 세상이라. 나 혼자 여기서 만세하고 그냥 진짜 다 느끼면서 그냥 있다보니까 어느새 5년이 돼 버린 거예요.
김 : 색소폰과 대북, 징, 풍경까지 혼자 연주하는 공연방식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어요?
우 : 처음엔 재즈를 연구했죠. 그래도 유학도 갔다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유학을 가서 재즈 공부를 하면서 도저히 얘네들을 못 따라가겠고, 나는 좌절을 해 버린 거야.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그냥 유학을 다 집어 치우고 되돌아왔죠. 그때부터 제가 이제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거예요. 악기를 만지기도 싫고. 진짜 술로만 살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이제 한 가정에서 죽느냐 사느냐, 이거 이렇게 살면 뭐하냐, 여기까지 이제 갔죠.
그러다가 어느날 생각해 보니 아메리칸 재즈도 결국은 따지고 보면 흑인들이 애환을 표출하는 어떤 그런 장르거든. ‘그럼 나는 우리 한국적 한을 표출하자. 그러면 이제 걔네들 한과 우리 한민족의한과 차이가 뭐냐?’ 이런 발상을 하면서 내가 색소폰을 부는 방식이 이제 달라진 거예요. 우리 한민족 한은 부드럽고 아름다워 갖고는 한이 안 나오잖아? 거칠고 강한 극도의 어떤, 그렇게 색소폰으로 톤을 컨트롤 하는 연주를 하면서 거기서 완전히 내가 내 갈 길을 정해 버린 거야.
그때부터 내가 이제 정식으로 아예 집사람한테도 선포를 하고 나는 이거 연구하다가 안 되면 죽을 거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죠. 처음부터 북이랑 같이 연주는 안 했죠. 일단 색소폰을 한 손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테크닉을 습득을 하고 나서 북도 치고 징도 치고 차차로 공연을 다 업그레이드를 한 거예요. 이렇게 완성이 된 거죠.
우곡의 공연 모습
김 : 유사한 공연을 하시는 분이 없나요?
우 : 대한민국에 없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없어요. 왜냐하면 한 손으로 색소폰을 불 수가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니깐요.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다 비웃어요. ‘그러면 왜 여기 사냐’ 이거지, ‘니가 그렇게 전 세계 사람이 아무도 할 수 없는걸 하고 있으면 니가 왜 여기서 공연하고 있냐?’ 이거지. 예술의 전당 가야지. 그런 비웃음을 사고 그럴 때가 제가 제일 좀 딜레마예요.
어떤 딜레마냐? 한편 기분 좋기도 하고 한편에는 씁쓸하기도 하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 말을 믿을 수 없으니까 나를 비웃는 거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고 있다’ 하는 내면적인 행복감도 있어요. 씁쓸하고 묘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그런 얘기를 잘 안 해요.
김 : 지금 생활에 만족하세요?
우 : 저는 나만의 행복 지수가 높은 사람이예요. 제 행복 지수는 어느 정도냐 하면요. 산악인들로 치면 에베레스트 이런 데 정복을 해서 태극기 꽂고 내려온 그 순간,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가 그런 단계에서 있지 않나. 그러니까 뭐가 더 이상 필요하겠냐는 거지. 저는 정말 속세에 사는 토굴 사람이라고. 저는 제 이름으로 된 아무것도 아예 애초부터 없어요. 통장도 하나도 없어요.
김 : 여기서 공연하시면서 보람 있으셨던 일은 어떤 게 있으세요?
우 : 보람은 지금 현재는 없어요. 딱 그냥 내가 뭔가를 이렇게 완성했다는 거에 자부심, 긍지를 느끼는 그런 기분이에요. 내 스스로가 지금 여기 있어서 행복한 느낌, 그거죠. 내가 생전에 (우곡아리랑을) 완성을 했으니까, 그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지금 나는 하산을 하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김 : 공연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 많이 모이고 박수 갈채를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별로 없으신 것 같던데...
우 : 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공연시작을 잘 안 해요. 왜 안 하느냐? 들을 준비가 안 돼 있는데, 내가 하면 뭐 하냐는 거지. 자기네들끼리 얘기 보따리 풀어놓고 음담패설하고, 여자 얘기, 정치 얘기 하면서 내 공연이 같이 묻히고, 그리고 듣지도 않아놓고는 괜히 이제 끝나면 박수 한번 쳐주고... 그런 것보다 나는 오히려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내가 공연을 시작하면 사람이 오잖아요. 그러면 이제 제대로 내 공연을 보고 마무리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좋아요.
김 : 회남재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공연하시기에 어떠세요?
우 : 저는 관중이 없을 때 연주하는 걸 더 좋아해요. 나는 초청공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여기는 너무 좋은 게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공연 언제 합니까?” 그러면 나는 딱 그냥 “2시에 합니다” 그래. 흔히 말하는 숫자 2시가 아니고 우선 ‘관객이 원할 시’,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을 시’ 합쳐서 2시에 한다는 거지. 하하하.
김 : 진짜 자유로운 영혼이시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