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악양은 대봉감 주황빛으로 덮인다. 온 들녘과 산에 대봉감 천지다. 올해는 유독 감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봉감이 대풍년이다.
대봉감밭. 대봉감을 미처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
악양은 10월 25일부터 11월 15일까지 약 20일간 대봉감을 딴다. 보통은 11월 10일 전후에 다 딴다. 10일이 넘어서면 감이 빠르게 홍시가 된다. 서둘러 따내서 저온창고에 넣는 게 예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11월 20일이 넘어도 따지 못한 감이 곳곳에 있다. 감이 따도 따도 끝이 없다. 농부들은 예년보다 2.5배 정도로 많다고 입을 모은다. 풍년이 좋긴 하지만 준비한 것들을 넘어서니 대책이 없다. 모든 게 부족하다.
저온창고가 가득 찼다
집집마다 저온창고가 넘쳤다. 더 넣지 못하고 바깥에 쌓아두거나 나무에 매달아 놓거나, 따서 밭에 모아두기도 했다. 집집마다 감을 따는 한편 감을 깎았다. 저온창고에 넣을 수 없으니 말랭이와 곶감을 빨리 만드는 것이다.
플라스틱 상자가 모자랐다
감을 담는 20킬로 플라스틱 상자가 모자랐다. 농협에서 새 상자를 준비하자마자 다 팔려서 필요량을 감당 못 하고 있다. 농협도 수매를 위해 3,000개를 더 사들였다. 올해 쓰고 나면 내년엔 필요 없을 테니 새 것을 많이 사기도 부담스럽다. 하동읍이나 다른 면에서 상자를 빌려 온 농부들도 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상자를 못 구해 밭에 쌓아두기도 했다.
감 딸 일꾼이 없다
일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아니, 일손 구하기를 포기했다. 하동읍 인력시장에도 사람이 없다. 모든 농가가 동시에 감을 따고, 깎다 보니 동네 분이건 외국인 노동자건 사람이 없다. 주말에 도시에 사는 가족과 지인들이 들어와서 일손을 돕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대봉감을 트럭에 가득싣고 수매를 온종일 기다리는 농민들
농협 수매가 포화상태다
농협에서 대봉감 수매를 11월 1일부터 시작했다. 수매 첫날 새벽 5시부터 농협 앞에 감 상자를 실은 트럭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니 문을 연 9시에는 그 줄이 500미터가 넘었고 오전 내 이어졌다. 그날 오후 농협에선 ‘선별작업이 오래 걸려 수매를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다가 5일 후 2번째 수매를 했는데, 이 때는 그 전날부터 트럭들이 1킬로미터 정도 줄을 섰다. 500미터 전진하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하루 일을 포기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농협창고도 가득 찼다. 농민들도 농협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농협에선 횡천면에 있는 ‘지리산 청학농협’ 창고를 빌려서 11월 15일에 마지막 수매를 했다. 이때는 이틀 전부터 트럭을 세워두며 줄을 섰다. 농협은 줄을 선 농민들에게 빵과 우유를 제공하고, 순서표를 나누어주어 차를 세워두더라도 농민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순서표를 받은 감은 모두 수매하였다.
농협경제사업장 직원들 20여 일간 비상근무
11월 1일부터 20일까지 화개악양농협 경제사업장 7명의 직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씩 비상근무를 하며 농민들과 함께 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수매와 선별준비를 하고 오전 9시에 선별하기 시작하여 밤 9시에 선별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면 밤 11시였다. 수매담당자 안성철 씨는 “농민들이 하루종일 차를 대 놓고 기다리고, 감밭에는 감을 따지도 못하니 얼마나 마음이 그렇겠어요. 우리도 쉴 수가 없죠. 덕분에 살 좀 뺐죠”라며 웃었다.
수매한 양이 예년의 두 배, 600여 톤이다. 수매를 위해 상자를 급하게 추가 구매하고, 파렛트는 하동농협에서 빌려오고, 저온창고도 이웃농협 것을 빌렸다. 이렇게 사들인 감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화개악양농협 경제사업장 박경용 팀장에게 물어보았다. “기존 거래처들도 있고, 우리 농협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해운대농협이나 동탄농협, 안산농협 등에 판매하고 있어요. 최대한 팔아봐야지요. 적자를 보더라도 조합원들, 농민들 감을 최대한 사들여야 했죠. 농민들이 감을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 농협이 제 역할을 해야지요” 농협은 해마다 상인들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였다. 올해도 다른 곳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다 보니 감이 더 많이 몰렸다.
악양만 대봉감 풍년이 든 게 아니다. 전국이 풍년이라 감값이 예년보다 싸다. 악양감이 좋아서 사기로 했던 상인들은 계약금을 포기하고 싸게 파는 지역의 감을 사는 일이 속출했다. 악양은 우리나라에서 대봉감을 처음 심은 시배지로 일조량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져 색깔, 모양, 맛, 향이 뛰어나다. 다른 지역보다 20킬로 1상자에 1만 원 정도 더 비싼 편이다.
대봉감을 출하하는 트럭 앞에 서있는 화개악양농협 대봉감 수매담당 안성철씨
대봉감 홍수로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을 나 몰라라 하는 지역 정치권
대봉감 홍수 속에 아쉬운 점도 많다. 특히 군수와 군청이 나서서 판매망을 확대하거나 농민들을 돕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런 지원은 없었다. 군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줄 선 농민들을 찾아오거나 농협을 방문하여 현황을 파악하려는 지역 의원들은 없었다. 오히려 이태원참사 애도기간이기도 했던 이 때 제주도로 연수를 가서 입방아에 올랐다. 지자체와 군의원들이 농민들의 삶을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악양은 대봉감과 씨름 중이다. 농민들은 곶감과 감말랭이를 만드느라 정신없다. 예년보다 두배 이상 많은 대봉감과 가공품들. 잘 팔릴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야 할 때다.